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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억대의 차이가 나다

 

.. 거실에서 녹지의 조망 여부에 따라서 같은 평수의 아파트라도 가격이 수천만 원에서 억대의 차이가 나는 오늘의 현실이다 ..  《윤호섭 외-녹색캠퍼스를 꿈꾸며》(이크,2004) 32쪽

 

 보기글에는 토씨 ‘-의’가 네 차례 나옵니다. 우리 말 토씨 가운데 글월 하나에 이렇게 자주, 많이 쓰이는 토씨가 또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가’가 네 차례 잇달아 쓰인다든지, ‘-을’이 네 차례 쓰인다든지 하는 일이 있을는지요. 지난날에는 거의 안 쓰던 토씨 ‘-의’가 이렇게까지 자주 쓰이고 많이 쓰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만큼 쓰임새가 늘기도 했겠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말투를 잃거나 버리거나 갈팡질팡 헤매고 있음을 보여주지는 않을는지요.

 

 ┌ 녹지의 조망 여부

 │→ 푸른 땅(숲)을 볼 수 있는지

 │

 ├ 같은 평수의 아파트라도

 │→ 평수가 같은 아파트라도

 │

 ├ 오늘의 현실이다

 │→ 오늘날 현실이다

 │

 ├ 수천만 원에서 억대의 차이가 나는

 │→ 수천만 원에서 억대로 틈이 벌어지는

 │→ 수천만 원에서 억대까지 달라지는(벌어지는)

 └ …

 

 보기글을 보면, ‘거실’, ‘녹지’, ‘조망’, ‘여부’, ‘가격’, ‘차이’라는 말이 보입니다. 이런 말을 꼭 써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루, 푸른 땅(숲)-풀밭-수풀, 봄(보다,보기), -는지, 값, 다르다(다름) 같은 말을 넣어도 넉넉하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낱말 하나를 쓸 때에도 좀더 알맞는 말을 찾으려고 하지 않으니, 게다가 우리 삶을 살포시 담아내는 낱말을 헤아리지 않으니, 토씨 하나를 붙여도 엉뚱하게 뒤틀려 버리는지 모르겠어요.

 

 

ㄴ. 소의 변

 

.. 소의 변에서 생겨난 O157균은 몇 년 후 일본에 상륙하여 14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고 나서 마침내 기록적인 식중독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  《고와카 준이치/생협전국연합회 옮김-항생제 중독》(시금치,2005) 39쪽

 

 “몇 년(年) 후(後)”는 “몇 해 뒤”로 다듬고, “기록적(記錄的)인 식중독 사건”은 “엄청난(크나큰) 식중독 사건”으로 다듬어 줍니다. “일본에 상륙(上陸)하여”는 “일본에 들어와서”나 “일본에도 번져서”로 손보고, “일으킨 것이다”는 “일으켰다”로 손봅니다.

 

 ┌ 소의 변

 └ 소똥 / 쇠똥

 

 ‘변(便)’이라고 한다고 더 깨끗해질까요. ‘똥’이라 말하면 지저분할까요.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똥이니 오줌이니를 지저분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가리키는 말도 지저분하다고 느끼고 똥 또한 지저분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니 ‘소똥’이 아닌 ‘소의 변’이라는 이상한 말까지 쓰고 말아요.

 

 보기글이 실린 책 40쪽을 보면 “항생제나 합성항균제를 섞은 곡물 사료를 주자 쇠똥에서 O157균이 검출된 것이다.” 하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책을 쓴 사람은 ‘소의 변’과 ‘쇠똥’을 섞어서 쓴 셈이군요.

 

 가만가만 생각하면, 이런 말도 쓸 수 있고 저런 말도 쓸 수 있습니다. 그래, ‘나는 똥이라는 말을 지저분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쓰기 싫다’고 말하는 이들한테 ‘네가 그렇게 쓰는 말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참 힘듭니다. 딱하기도 하고요. 이런 분들한테는 말이 문제가 아니라 말을 어떻게 어떤 자리에 쓰느냐가 문제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문제라고 해 보았자 씨알이 안 먹히겠다 싶기도 해요.

 

 소똥은 소똥이고 닭똥은 닭똥이며 개똥은 개똥입니다. 말똥은 말똥이고 돼지똥은 돼지똥이고 사람똥은 사람똥입니다. 새똥은 새똥이고 물고기똥은 물고기똥일 테지요. 있는 그대로 말하고 보이는 대로 이야기하며 느끼는 대로 적을 뿐입니다. 말이든 글이든 없는 것을 있는 듯, 있는 것을 없는 듯 쓰는 일은 안 좋아요. 억지스런 겉꾸밈이나 겉덮기를 하면 낱말도 뒤틀리기 일쑤이고, 낱말이 뒤틀리면서 토씨 ‘-의’가 알량하게 끼어듭니다.

 

 

ㄷ. 이 산의 정상

 

.. 이 산의 정상은 약간 눈에 덮여 있다 ..  《테사 모리스-스즈키/한철호 옮김-북한행 엑서더스》(책과함께,2008) 39쪽

 

 ‘정상(頂上)’은 ‘꼭대기’로 다듬고, ‘약간(若干)’은 ‘조금’으로 다듬어 줍니다.

 

 ┌ 이 산의 정상은

 │

 │→ 이 산 꼭대기는

 │→ 이 산은 꼭대기에

 └ …

 

 산에서 가장 높은 곳을 두고 ‘산머리’라 합니다. 산에서 머리와 같이 가장 위에 있으니 이런 낱말을 지어서 가리킵니다. 이와 마찬가지 뜻으로 ‘산꼭대기’라는 낱말을 쓰기도 합니다. 산에서 꼭대기에 있으니 ‘산꼭대기’입니다.

 

 ┌ 이 산의 꼭대기에는 (x)

 └ 이 산 꼭대기에는 (o)

 

 까치 같은 새는 ‘나무 꼭대기’에 둥우리를 짓습니다. ‘나무의 꼭대기’에는 짓지 않아요. 그러고 보면 ‘지붕 꼭대기’에 둥우리를 짓는 새도 있습니다. ‘굴뚝 꼭대기’에 둥우리를 짓는 새도 있고요.

 

 버르장머리없이 구는 사람을 일러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려 한다고들 합니다. ‘머리의 꼭대기’에 올라서려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들은 어찌하다가 “이 산의 정상”처럼 말하는 매무새를 보여주게 되었을까요. 우리들은 어찌하여 우리 말투를 잊고 우리 글투를 잃게 되었을까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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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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