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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1월 5일)

 

히말라야 발자국
09:00   도레이(Dole, 4,110m)

11:00   마체르모(Machermo, 4,410m) 

          Namgal lodge

히말라야의 밤이 조금씩 익숙해진다. 또 다른 일상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밤마다 시달리는 불면증으로 인해 머나먼 사유의 세계로 도피한다. 어제도 10시에 깬 후, 새벽 3시가 넘어서야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특히, 판잣집에 날아갈 듯한 광풍(狂風)이 몰아쳐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가는 상상을 하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히말라야의 흐느낌이 밤새 귓속을 파고든다. 허름하게 만들어진 판잣집이 날아가면 어쩌나? 판잣집이 날아가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침낭만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매일 밤 10시 안팎으로 잠이 깨면 소변의 욕구가 날 재촉인다. 어제도 소변을 보려 밖으로 나오니, 히말라야의 밤하늘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미적 표현 도구로도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이곳에 있었다. 아름다움에 넋이 빠져 있다가 거대한 자연 속에 '혼자' 던져져 있다는 두려움이 순식간에 나를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자연의 공포에 쫓겨 롯지로 후다닥 달려 들어와 침낭 속에 누웠다. 내 모습에 자위 섞인 조소가 일어난다.

 

자연이 뿜어내고 있는 무형의 힘에 대해서는 두려워할 줄 알면서도 어찌 나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일까? 알버트 슈바이처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위해 밤마다 기도하지 않았던가? 그는 생명이 너무 소중하고 아름다워 두려움을 느낀다고 하였다. 그리고 평생을 살아 있는 생명에 헌신한 삶으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증거하였다. 나도 기도한다. 자연의 신비가 거대한 공포감을 주듯, 인간에 대한 깊은 경외감이 인간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겸손함을 주지는 않을까? 괜히 내 모습이 시골 길가에 피어 있는 민들레홀씨 같다는 생각을 한다. 지나가는 모든 세상의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자신의 홀씨가 어디엔가 날리기를 꿈꾸는 가련한 야화(野花)여!

 

아침 일찍 도레이 롯지에서 길을 나서기 위해 방문을 열려고 하니 번호자물쇠의 키 번호가 맞지 않았다. 이리저리 번호를 맞추어도 열릴 생각을 않는다. 이런 낭패가 다 있나? 어찌할까. 이때 함께 투숙하고 있던 가이드가 주저 없이 문짝을 잡아당기며 우지직 자물통을 빼 버렸다. 문이 부서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우니(여자 주인)를 볼 면목이 없다.

 

산 아래부터 이곳 4000m까지 내가 걸었던 똑같은 길을 밟으며 판자를 머리에 이고 왔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을 나의 부주의한 실수로 부수고 만 것이다.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사우니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며 나를 안심시킨다. 그 모습에 미안함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른다. 히말라야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여유 있고 너그럽다. 그들의 품성이고 삶인가 보다. 어쩔 수 없이 음식 및 방값 450루피에 50루피를 더하여 계산했다. 이 정도의 돈 몇 푼으로 그들의 땀과 수고로움에 보상이나 되겠냐마는,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인 것을 어떡하랴?

 

 

 

 

도레이에서 마체르모까지는 산책하듯 천천히 걸으면서 초오유, 촐라체, 타보체 등의 히말라야 파노라마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는 편안한 길이다. 아침부터 두통이 심해 천천히 걸었다. 나란이 계속 '비스타리, 비스타리(천천히)'하며 날 걱정해 주었다.

 

휴식 때마다 문법도 맞지 않는 영어 대화를 하며 나란과 힘겨운 싸움을 치른다. 오늘은 마체르모에 거의 다다를 쯤 잠시 쉬면서 일기를 쓰고 있는데, 그것이 신기한지 계속 수첩을 지켜보다 한 마디 던진다.

 

"Do you write for wife?(당신 부인에게 쓰는 건가요?)"

 

나란의 정확한 이름을 알고 싶어 물어보니, family name(성)이 '갈래'이고, first name(이름)이 '나란' 곧 '나란(나랑) 갈래'가 되었다. 그래 나란에게 그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한국말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다.

 

"나란(랑) 갈래 is korean mean 'go with me(나란 갈래는 한국말로 '나와 함께 가자)예요."

"Hey, Mr.kim 나랑 갈래."

 

나란이 매우 재미있어 하며 한 마디 던진다.

 

"You are always smile face(당신은 항상 웃는다)."

 

카트만두에서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팔리에게 지나친 친절을 베풀거나 잘 대해주지 말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그들이 건네준 색안경을 낀 편견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것은 그들의 만남이었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인식의 틀이기 때문이다. 나는 있는 그대로, 나만의 따뜻한 방식으로 대하고 싶다. 나와의 만남이고 나와의 관계맺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이해해주는 나란에게 고마울 뿐이다.

 

 

가면을 벗고 생얼을 봐라

 

모든 선입견과 편견, 오류를 배제하고 세상과 사물을 순수하고,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진짜 사랑을 하려면 가면을 벗기고 생얼을 보라며 우리에게 호통을 치는 이들이 있다.

 

먼저 현상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훗설이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 편견, 수많은 오류 없이 직접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진실되고 완벽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믿음과 지식은 단순한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고 형성된 것이다. 이를 '자연적 태도'라고 하는데, 이렇게 세상을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자연적 태도에 기초한 모든 주장과 믿음에 대해서 잠시 판단을 보류하라. 즉 '판단중지'를 하라고 그는 말한다. '잠깐만, 정말이야?', '진짜야?', '진실이야?' 부정이 아니라 정확한 인식을 위한 보류이다. 잠시 괄호를 쳐라. 그리고 판단이 중지된 시선을 의식 내부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훗설 현상학의 단초가 되었던 합리론자 데카르트는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해 모든 불확실한 것을 의심하고 회의하였다. 절대적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가장 확실한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아무 것도 믿지 마라. 의심하고 또 의심해라. 이를 '방법적 회의'라고 부른다.

 

'내가 전에 참이라고 믿었던 것들 중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과정에는 그는 확실한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내'가 지금 '의심'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심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나'라는 주체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생각하는 내가 없다면 아무 것도 없게 된다. 그리고 유명한 명제를 발표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것만이 절대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위의 두 사상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바로 벌거벗은 '진실'이다. 인간을 모든 편견에서 해방시키라는 것이다. 의심하고 회의하고, 판단을 보류하고 중지하고, 모든 우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옷을 벗고 알몸으로, 내가 의식의 주체가 되어 진실과 대면하라는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성철 스님이 법어로 인용하며 유명해진 구절이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산이 산이지, 그럼 산이 물이란 말인가? 화두에 대한 답이 있을까마는, 박이문 교수의 말이 가슴을 와 닿는다.

 

① 산시산, 수시수(山是山, 水是水)

② 산불시산, 수불시수(山不是山, 水不是水)

③ 산시수, 수시산(山是水, 水是山)

④ 산시산, 수시수(山是山, 水是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믿었는데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구나

산은 물이고 물은 산으로 보이는데

산은 역시 산이고 물은 역시 물이로다

 

①에 있어서의 산과 물이 상식적으로 본 산과 물인데 반하여 ④에 있어서의 산과 물은 완전해탈(깨달음)의 차원에서 본 산과 물이다. 바꿔 말해서 ①과 ④에 있어서 물질적으로는 똑같은 산과 물이지만, 의미적으로 즉 논리적으로 볼 때는 전혀 다른 산과 물이다. ①의 차원이 ④의 차원으로 옮겨 가는 아니, 승진하는 과정에서는 ②와 ③이란 차원이 가로 넘어있다. ①의 차원에서 생각을 좀 더 밀고 나갈 때 우리는 산과 물을 의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②의 차원이다. 서양철학에서 볼 때 데카르트가 도달한 경지는 겨우 이와 같은 차원 ②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②에서 생각을 보다 파고들면 ③의 차원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는 산과 물을 의심하는데 그치지 않고 산과 물을 바꿔서 볼 수 있다. 그러다가 다시 더 생각을 끌고 가면 우리는 산을 산으로 그리고 물을 물로 볼 경지에 이른다. - <노장사상> 박이문

 

①의 산과 물은 무엇일까? 세상이 우리에게 주입하고 가르쳐 준 대상이다. 내 의식 작용의 어떤 개입도 없이 순전히 나에게 '부여된' 모습일 뿐이다. '이것이 산이라는 것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알아.' 그들이 준 대로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④의 산과 물은 회의와 의심을 통해 내가 의식적으로 깨달은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산이다. 내가 주체적으로 '재창조한' 산이다. 세상의 산에서 이제 나의 산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산이다. 결국 ①에서 ④로의 전환은 회의와 의심을 통해 편견과 선입견, 우상(偶像)과 거짓, 위선이 모두 제거된 '진짜'를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 또한 그렇지 않을까? 비틀어도 보고, 뜯어도 보고, 깨물어도 보자. 한 번 의심해 보자. 내가 보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인가를. 세상과 사회의 구조적 틀이, 권력을 가진 자가 알려 주는 삶의 정답이, '너에게만 말한다며' 속삭이는 타인의 감미로운 말이 거짓의 가면일 수도, 진짜 세상을 대면하지 못하게 하는 두터운 장막일 수도 있으리라.

 

나란을 만난 것에 대해 거듭 감사한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겠지만, 인간사가 어찌 내 마음대로 되는가? 나란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할수록 그의 올곧음과 선함, 성실함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로는 설산에 감동하고, 아래로는 나란의 삶에 감동한다. 위로는 자연이요 아래로는 인간이니, 나의 트레킹은 부족함이 없어라. 네팔의 신인 쿠마리와 거네스에게 감사한다.

 

나란! 나란 갈래?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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