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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겉그림 이경학의 엽서그림 〈나의 왼손〉
책겉그림이경학의 엽서그림 〈나의 왼손〉 ⓒ 사문난적

자라나던 생명이 멈추어 서면 모든 생명체들로부터 차별을 당합니다. 원인 모를 병에 사지가 갇히게 되면 모든 실존으로부터 단절을 겪습니다. 소생할 기약조차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은 체념을 불러오게 됩니다. 체념은 죽음보다 더 가혹한 절망입니다.  

 

보통의 나이에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왼손으로 저만의 그림세계를 펼쳐야 할 이경학도 그런 아픔을 당했습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 재학 중 독일로 유학을 갔다가 원인 모를 병으로 하반신과 좌반신이 마비가 되는 고통과 체념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 몸으로 햇볕을 받아내며 키를 키워가고 있던 미루나무로부터 생명의 힘을 발견한 그는 자신에게 아직 오른손이 움직이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것을 감지할 수 있고, 조정할 수 있는 머리는 그에게 작은 희망의 빛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긴긴 체념의 끝자락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왼손 대신 오른손으로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휠체어조차도 혼자서 움직일 수도 없고, 그에게 주어진 작은 신경들을 넓은 캔버스에 전부 쏟아 부을 수도 없는 탓에, 작은 엽서 그림에 도전해야 했습니다.

 

그의 엽서 그림인 <나의 왼손>은 바로 그 과정 속에서 나온 책입니다. 왼손의 그림 세계를 잃어버린, 죽음보다 더 가혹한 체념으로부터 오른손의 실낱같은 희망을 발견한 이후 여러 지인들에게 20년 동안 수백 장의 엽서 그림들을 보냈는데, 그 중 170여장을 모아 개인전을 열었으니, 이 책은 그것의 일부를 모은 작품집이기도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태복음 6장 3절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금언이다. 그 말의 의미를 떠나서 물리적으로, 나의 모든 행위는 그렇게 되고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나의 왼손은 모르고 있다."(135쪽)

 

장래가 촉망받던 왼손잡이 화가였던 그가 왼손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오른손으로 다시 그림을 시작해야 했으니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다른 것은 관두고서라도 오른손에 연필을 쥐고서 다시 시작한 선 그리기의 과정들을 지켜보노라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지난날의 참기 힘든 모든 과정들을 묵묵히 견뎌냈습니다.

 

그렇다고 가로 14㎝, 세로 10㎝의 엽서 그림들이 세상에 뽐내 보려는 작품 전시회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겪은 차별과 단절, 절망과 체념으로부터 일어서서 세상과 대화하려는 소통의 창문이었습니다. 더욱이 그것은 소박한 창작의 즐거움을 넘어서서 세상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려는 도장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잘 자라고, 잘 나가던 것들이 순식간에 멈추어 버리는 듯한 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경제 한파가 그 주범이기도 하지만, 함께 살자고 제 살을 깎아 내고 힘을 북돋아주는 이가 없는 게 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머잖아 푸념 섞인 체념들이 곳곳에서 쏟아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준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어쩌면 신은 이경학의 왼손을 가져간 대신 오른손이라는 희망을 선물로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기에 젊은 날 예기치 못한 인생의 태풍을 맞은 뒤, 자신의 오른손을 통해 실낱같은 희망을 건져 올린 이경학의 엽서 그림들을 통해 적잖은 위로와 소망을 얻었으면 합니다.


나의 왼손 - 이경학 엽서그림

이경학 지음, 사문난적(2008)


#이경학의 엽서그림#나의 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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