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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로운 봄 햇살이 간밤 움츠려든 옹달샘을 적시는 이른 아침입니다. 아직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들판이지만 성질 급한 꽃들은 벌써 저마다 자태를 뽐냅니다. 이제 기나긴 겨울이 지났습니다. 동굴에서 겨울을 보낸 아기 곰 바리가 드넓은 세상으로 나 온 것도 그때입니다.

 

바리는 지천에 깔린 꽃과 난생 처음 보는 풀과 아득히 걸려있는 구름과 바람, 그리고 동물들을 보며 세상에 태어난 것이 행복했습니다.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뜨고 하염없이 뻗어나간 초원을 보고 있는 바리 앞에 나비 한마리가 알짱거립니다. 바리가 나비를 쫓아 뛰어갑니다. 나비도 자신을 쫒아오는 바리가 싫지 않는 듯 두 날개를 파닥거리며 희롱합니다.

 

"바리야! 이리 온."

두발을 한껏 들고 나비와 장난을 치던 바리를 깨운 것은 엄마입니다. 바리가 짧지만 힘찬 발길질로 엄마에게 달려갑니다.

"엄마! 엄마!"

 

그 순간 바리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입니다. 자신을 놔두고 엄마에게 달려가는 바리가 야속한지 나비가 연신 자기랑 더 놀아 달라며 바리의 머리 위를 뱅글뱅글 돕니다. 모든 것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이른 봄입니다.

 

"바리야 ! 오늘은 네가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 날이니까 마을 구경하러 가자. 마을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야 나도 살고 너도 살 수 있어. 항상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알았지?"

바리는 엄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모처럼의 첫 외출에 신나기만 합니다.

 

"마을은 많은 동물들이 한데 어울려 사는 곳이니까 너 맘대로 하면 안 된다. 아마 넌 나이도 어리니까 다른 동물들 보면 무조건 먼저 인사하고, 상냥하게 웃고 그렇게 하렴. 알겠니?"

"네."

엄마의 당부에 바리가 씩씩하게 대답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마을은 또 어떤 모습일까?' 마을길로 내려가는 내내 마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는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이윽고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은 많은 동물들로 활기가 넘쳤습니다.

 

긴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요염하게 걷는 여우, 아낙네들과 붉은 엉덩이를 내 놓고 입안 가득 음식물을 넣은 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거리를 활보하는 늙은 원숭이, 짧은 다리로 부지런히 생선을 이고 거리를 오가는 너구리, 온 몸에 가시를 세운 채 무서운 모습으로 쥐구멍에서 나오는 쥐들을 검문하는 경찰관 고슴도치, 얼굴에 멍이 든 채 풀 죽어 있는 세탁소 팬더 아저씨, 프라이팬을 들고 팬더 아저씨를 윽박지르고 있는 앞집 슈퍼마켓 호랑이 아줌마, 긴 머리를 휘날리며 그 옆을 못 본 체 지나가는 미용사 사자 아저씨, 분위기 파악 못하고 거리를 쏜살처럼 달리는 폭주족 얼룩말, 그 뒤를 쫒아가는 닌자 거북이, 그 와중에 난간에 기대어 햇살을 맞으며 졸고 있는 꽃집 고양이 아줌마 등 엄마가 일일이 가르쳐 주는 동물들은 생김새부터 하는 행동까지 바리에겐 모두가 낯설고 신기해 보였습니다.

 

"엄마! 참 신기해. 팬더 아저씨는 점만 빼면 우리랑 많이 닮았다. 그지?"

"참 좋으신 분인데. 결혼을 잘못해서 맨 날 저렇게 당하고 사는구나. 넌 나중에 여자 잘 만나서 살어."

 

팬더를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묻어납니다. 엄마의 표정은 아랑곳없이 바리는 이곳저곳을 구경하느라 신납니다. 엄마가 야채 가게로 들어갑니다. 큰 얼굴의 황소 한 마리가 덩치에 안 맞게 큰 손으로 마늘을 까고 있습니다.

 

"아고 이게 얼마만이에요. 겨울잠은 잘 잤소?" 황소가 반갑게 엄마를 맞이합니다.

"눈이 좀 부었죠? 올 겨울은 유난히 길어서 좀 오래 잤더니..." 엄마가 입을 가리고 웃습니다.

"요 녀석은? 아들?"

"네. 요번에 출산 했어요. 어서 인사해 뭐해?"

"아고! 그 놈 아빠를 쏙 뺐네 그려." 황소의 말에 엄마의 얼굴이 슬퍼집니다.

 

"아참! 내 입 봐라. 요놈의 조동이. 미안해요." 황소의 자신의 입을 때립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뭘."

"안녕하세요? 바리에요."

바리가 황소에게 인사를 합니다. 황소가 바리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방금 깐 마늘을 건넵니다.

 

"아니! 뭘 이렇게 귀한 걸 애들한테 줘요. 괜찮아요." 엄마가 손사래를 치며 사양합니다.

"괜찮아요. 이거 먹어봐. 이게 곰한테는 최고야. 이게 먹으면 사람도 될 수 있다는 마늘 이란다." 황소가 마늘 몇 개를 바리의 손에 쥐입니다.

바리가 호기심에 마을을 깨물어 봅니다. 아릿하고 쓴 맛이 입 안을 쏩니다.

 

"이걸 어떻게 먹어요. 원래 몸에 좋은 건 쓴 법이란다. 먹어!"

황소가 껄껄 웃으며 바리의 어깨를 칩니다. 엄마도 함께 웃습니다.

"올해는 우리 과일 좋은 값에 사 주실 꺼죠?"

 

"그럼요. 품질은 아줌마네가 최고죠. 그런데 우린 야채가 전문이라.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놈의 욕심쟁이 원숭이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네요. 이번엔 품목을 좀 바꿔 보는 것이 어떠세요?" 황소가 조심스럽게 엄마에게 말합니다.

 

"한 평생 몇십년 키운 과일나무를 하루아침에 걷어낸다는 것이 쉽지 않아요. 배운 게 그것밖에 없는데요 뭘. 그냥 천직이러니 하고 살지요."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바리 아빠도 그 원숭이 때문에 홧병으로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막말로 과일은 원숭이가 제일 많이 먹잖아요. 실컷 농사지어 놓으니까 곰이 생산한 과일은 맛도 없는데다 비싸다고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니고, 자기들은 멀리 이웃마을에서 사 먹으니. 아줌마가 생산한 과일이 어디 팔려요?"

 

황소가 원숭이를 성토합니다.

"다 우리 탓이죠 뭐. 원숭이와 친하게 지냈으면 이렇게 까지는 안 됐을 텐데…."

"이건 친하고 안 친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상거래의 기본 예의죠."

 

황소가 아직 화가 덜 풀렸는지 뿔을 좌우로 흔듭니다. 엄마가 미안한 마음에 황소에게 공손히 인사하더니 서둘러 가게를 나옵니다.

"늙은 원숭이한테 가봐야겠다. 올해는 지난해 같은 시행착오는 겪지 말아야지. 원숭이 비위도 좀 맞춰주고…."

 

엄마의 얼굴에 시름이 가득합니다. 늙은 원숭이가 사는 집은 나무위의 호화 저택이었습니다. 원숭이 집에 가기 위해서는 엘리베이터라고 불리는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엄마곰이 밧줄을 잡고 올려갈려고 하자 젊은 원숭이 한 마리가 부리나케 쫒아 나옵니다.

 

"안돼! 여긴 당신 같은 곰이 함부로 들어 올 것이 못돼. 어디서 교양도 없이 무례하게 여길 와. 이게 얼마짜리 집인 줄 알아? 할 이야기 있으면 여기서 해요."

 

젊은 원숭이가 버럭 화를 냅니다.

"아- 죄송합니다. 늙은 원숭이를 좀 뵈러 왔는데요. 우리 과일 때문에."

"아- 맞다. 작년에 그것 때문에 신랑이 죽었지. 안됐어. 그러니까 진작에 싼값에 제공했으면 됐잖아. 이 마을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과일을 소비하지 않나? 그러면 우리한테 잘해야지."

 

젊은 원숭이가 엄마를 윽박지릅니다. 자그마한 원숭이 녀석이 엄마를 혼내는 것을 보고 바리가 주먹을 불끈 쥐자 원숭이 녀석이 재빨리 나무위로 호들갑을 떨며 피합니다.

"바리야! 그러면 안돼! 여기 원숭이가 우리 과일을 사 주지 않으면 우린 먹고 살지 못해."

엄마가 울면서 바리를 말립니다.

"그럼. 이놈들 때문에 우리 아빠가 속상해 돌아가셨다는 거잖아요. 이놈들 오늘 그냥 가만 놔두지 않겠어! 내가 올라가서…."

 

바리가 밧줄을 타고 올라갈려는 순간 늙은 원숭이가 나무 위에서 소리칩니다.

"그래. 올라와라. 우린 이 집 다시 지으면 되지만, 너희들 과일은 우리 원숭이들이 하나도 안 사 먹을테니 해봐라 이 미련한 곰탱아. 야! 빨리 고슴도치에게 연락해서 저 놈들 여기서 난리친다고 연락해."

 

엄마가 바리의 등을 때리며 빨리 잘못했다고 빌라고 합니다. 바리는 내키지 않았지만, 엄마의 울부짖음에 할 수 없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 진작 그럴 것이지. 아무튼 앞뒤 안가리고 대드는 거는 그 아비에 그 자식이구먼. 굶어죽지 않으려면 우리한테 잘 해. 아들 교육 잘 시켜."

 

늙은 원숭이가 천천히 바닥에 내려옵니다. 바리가 눈물을 흘리며 사과합니다. 엄마는 바리에게 살기위해 자존심은 버리라고 합니다. 자존심을 버리면 세상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엄마는 바리가 아버지처럼 그렇게 허망하게 죽지 않았으면 하면 바람하나 뿐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비 한 마리가 바리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바리는 나비의 날갯짓을 뒤로 한 채 엄마 손에 이끌려 과수원으로 향합니다. 바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원숭이에게 팔 과일을 생산하기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숲속의 한 여름이 그렇게 지나갑니다. 엄마는 바리가 아버지처럼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바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살기 위해 비위를 맞추는 것이 몸에 배어 버렸습니다. 엄마가 과수원을 떠난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듯이 바리도 과수원에 얽매입니다. 바리는 원숭이에게 과일을 팔기 위해 한껏 몸을 숙였습니다. 바리의 모습에 다른 동물들도 바리를 무시합니다. 먹을 것을 제공하면서도 바리는 동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성인동화#아기곰#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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