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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집에서 책장 정리를 하고 있는데 파란 봉투가 하나 눈에 띄었습니다. 가슴이 파래질 만큼 짙은 파란 색이었습니다. 파란 봉투 속에는 이런 내용의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선생님, 하이! 저 인영이에요.

날씨 한 번 참 덥네요. 요즘 많이 힘드시죠? 알아요.

얼굴에 그렇게 써져 있어요. 많이 힘들다고

그리고 많이 피곤해 보여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힘내시라고 편지를 써요.

제가 말로는 잘 표현을 못해서요.

솔직히 이런 편지도 처음 써보구요.

 

선생님! 힘내세요.

우리 반 애들이 아직 사랑에 서툴고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래요.

저도 저희 아빠한데 직접적인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아직 저도 선생님의 사랑이 낯설고 어색해요.

그렇다 해서 저희 아빠가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에요.

단지 아빠도 서툴러서 그렇겠지만.


언젠가는 선생님의 사랑의 의미를 알겠죠. 또 그리울 수도.

주눅 들어 있는 선생님은 싫어요. 항상 웃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들에게 많이 지치신 선생님!!

언제나 밝게 웃으셨음하구요.


편지를 읽고 나자 제가 참 무능한 교사였구나 싶었습니다. 다시 그 아이들을 만난다면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습니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는 어느 만큼의 미적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대책 없이 너무 깊은 사랑에 빠져 있지 않았나 하는 반성의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무능함에 오래 빠져 있었던 것이 대견스럽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는지 학생들을 잘 관리하는 교사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내년이라도 담임을 맡는다면 과거처럼 아이들을 자유롭게 대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담임으로서 아이들에게 제공해준 그 자유의 공간이 그들에게 유익하리라는 믿음이 깨어진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과거와는 달리 어쩐지 윗분들의 눈치가 보이는 까닭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너 해전까지만 해도 제 마음은 아이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절제가 필요한 것은 인정한다고 해도 오로지 눈에 아이들만 가득 차 있었던 그때가 그립기도 합니다.


제가 아이들 눈에 주눅이 들어 보일만큼 무능한 교사가 아니었다면 사랑하는 제자가 건넨 파란 봉투의 편지를 받아보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마음도 몸도 지친 담임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파란 봉투에 편지를 담아 전해주었던 바로 그 순간에 교육의 눈길이 멎어야 한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오래 전에 아이가 건네준 파란 봉투를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떠오른 시입니다.  


먼지투성이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기형도의 ‘먼지투성이 푸른 종이’ 일부


먼지와 푸른 종이, 그 중 먼지에만 주목하는 사람은 그 너머에 있는 푸른색을 보지 못합니다. 반대로 푸른색에 눈길을 먼저 준 사람은 푸른 종이에 잠시 내려와 앉은 먼지를 닦아주려 하겠지요. 먼지를 닦아주다 보면 그 먼지를 뒤집어쓰는 일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것이 눈곱만큼도 억울하지 않았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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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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