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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다. 추운 날에는 어김없이 생각나는 것이 따끈따끈한 아랫목이다.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몸을 누이고 있으면 제아무리 동장군이 활개를 쳐도 따사롭고 평온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예년 기온을 되찾으며 영하로 내려갔던 수은주도 영상으로 올라 겨울햇살이 유난히 따사롭게 내리쬐던 지난 금요일(21일). 인천광역시 부평 산곡동 서울연탄 이산진(77) 할아버지와 배달용 리어카(인력거)를 앞에 두고 마주보고 앉았다. 할아버지가 쓴 모자와 얼굴 사이로 비추는 햇살 탓인지 40년 넘게 이 동네 아랫목을 따끈따끈하게 덥혀온 세월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기자가 "할아버지 이 동네서 오랫동안 일하고 있다기에 할아버지 얘기를 들으러 왔어요" 했더니 대뜸 이 할아버지는 "그런 것 안 해"라고 잘라버린다. 그리고선 한참 동안 말없이 주변만 정리하신다.

 

그래도 가지 않고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자 이 할아버지는 귀찮은 듯 "이것 봐봐(리어카를 가리키며) 일이 없으니 고물 주워 내다 팔고 또 담아 온 게야. 일이나 있으면 신나서 대꾸라도 할 텐데 일도 없으니 귀찮게 하지 말고 가보드라고"라고 돌아서며 "쯧쯧…전에는 세무서에서 허구 헌 날 영업 감찰 나와 귀찮게 하더니. 요새는 장사가 안 되니 그놈들이 안 오고 무슨 기자들만 오고 난리네 그려"라고 혼잣말을 하신다.

 

"세무서에서 영업 감찰이 나왔어요? 그게 뭐예요?"라고 묻자, 그 때서야 이 할아버지는 조금씩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말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 일쑤였다.

 

이 할아버지가 말한 세무서 영업 감찰은 연탄이 잘나가니 혹시 판매된 연탄수를 속여 세금을 덜 낼까봐 이를 감찰했었다는 얘기다. 이 할아버지에 의하면 연탄 1장마다 세금을 매겨 이를 징수했다고 한다.

 

우여곡절에 말문을 연 이 할아버지는 "지금도 자식들이 막 뭐라고 그려. 이 일 그만두라는 얘기지. 지난번에도 한 신문이 취재해 가서 자식들이 그걸 알고는 '기자들 오면 상대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게야. 그래서 케이비에스 무슨 인간시댄가 하는 사람들이 왔을 때도 안했다"고 말했다.

 

이 할아버지는 "사실 내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어. 이 동네 연탄보일러 몇 가구 안 되는데 그 사람들 나 없으면 안 되거든. 내가 일일이 배달해줘야 해. 동네 보면 알겠지만 차가 못 들어가는 골목길이 많아. 그래서 저기 저 수레(연탄 50장용 수레와 100장용 수레)에 싣고 가서 배달해. 지금같이 기름보일러, 가스보일러가 천지인데 연탄배달이 돈 되는 일이겠어. 그게 아니고 같이 살아야 하는 법이닌까 나도 이일 하고 있는 게야"라고 전했다.

 

45년 전 연탄가격 9원, 당시 쌀 한가마니 3000원

 

이산진 할아버지가 연탄과 함께 한 세월은 꼬박 45년 세월이다. 80년대만 하더라도 산곡동(현 산곡1동과 2동)일대에는 연탄가게가 35군데에 달했다. 이 할아버지는 "그러니 그때도 돈은 별로 못 벌었던 게지. 그렇게 많았으니 어디 돈 벌었겠어?"하고 웃으셨다.

 

집집마다 연탄보일러이던 시절 이 할아버지의 연탄은 잘 나갔다. 서울연탄으로 바뀐 것은 인천에 연탄공장이 없어지면서부터다. 부평역 인근에 강원연탄공장, 주안역에 제일연탄공장 등 인천에는 당시 8개 연탄공장이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강원연탄공장에서 가져오기도 했고, 제일연탄공장에서도 가져왔는데 강원연탄이 사라지고 제일연탄에서 가져 쓰면서 산곡동 '제일연탄'이라고 했다가, 지금은 서울에서 가져오게 됐으니 서울연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가게 간판은 이 할아버지가 직접 그린 것이라고 한다. 자세히 보니 '서울'이라는 글자 아래로 '제일'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45년 전. 이 할아버지가 이 일을 시작할 때 연탄 한 장 가격은 9원이었다. 7원에 가져와 9원에 판매를 했는데, 당시 쌀 한가마니가 3000원 정도 할 때라 연탄 백장을 팔아야 쌀 한두 되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 할아버지 혼자서 연탄을 나르고 있지만 예전에는 할머니와 같이 했었다. 현 가게에서 산곡동입구 삼거리(백마장 삼거리)를 지나 연탄공장이 있는 부평역까지 인력거를 끌고 가서 실어 날랐다.

 

세월이 흘러 연탄보일러가 점차 사라지면서, 연탄공장도 없어졌다. 이 할아버지는 "이문동에서 배달해 주는데 한번 시키면 2000장을 시켜야 해. 한 천이삼백 장 시키면 되는데 그렇게는 안 받아주거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한 트럭(2000장)을 시키는 수밖에 없어"라고 전했다.

 

취재가 끝나갈 무렵 동네 한 조그만 회사에서 연탄 백장 주문이 들어왔다. 반갑게 맞을 만한데도 이 할아버지는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연탄 한 장에 지금은 400원 내왼데, 하루에 많이 팔아야 이삼백장 팔거든. 그걸로는 살아갈 순 없지. 그래도 나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래서 이걸 붙잡고 있는 게야"라고 말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연탄보일러 세대들도 얼마 안가 자취를 감추게 될지 모른다. 이 동네 일대가 개발구역으로 예정되면서 서울연탄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보잘 것 없다며 낮추어 말하는 이산진 할아버지. 산곡동은 그가 있어 반세기 넘게 훈훈한 겨울을 보냈을 것이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어느 때보다 그리운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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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서울연탄#30년 부평지킴이#산곡동#부평구#부평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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