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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만에 이강국을 떠나 보내는 김수임

새벽이 되자 이강국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그에게는 일찍 원산에 가야 할 계획이 있었다. 김수임도 얼른 따라 일어나 그의 옷을 하나씩 집어 주었다. 이강국의 얼굴에는 의지와 신념이 넘치고 있었다. 김수임은 그런 이강국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녀는 꼭두새벽에 떠나야 하는 이강국이 안쓰러웠다.

"내가 나가고 나서 한참 있다가 수임이가 나가야 하는 것 알지?"

김수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강국은 김수임을 마지막으로 포옹했다. 다시 김수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강국은 김수임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대고 나서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이었지만 김수임은 마음이 흐뭇했다. 어젯밤 이강국이 자기에게 사랑의 고백을 했기 때문이었다.

"수임아,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예수님이 했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 그런데 예수님은 자식이 없었지만, 우리는 조국이 해방되면 아이들 낳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김수임은 이강국이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강국의 여인으로서 자부심을 새로 가졌지만 한편으로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어려웠다.

'그 사람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어.'

김수임의 생각으로 이강국은 나윤숙과 대조적이었다. 그는 자기의 일에 신념과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이강국의 말로는 서울에 온 지 한 달쯤 되었지만, 일 때문에 어제야 김수임을 찾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이강국이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전라도 광주에 있는 박헌영이라는 지도자를 만나고 온 것 같았다. 박헌영은 전라도 광주 일대의 운동 조직을 되살려 놓았다고 했다.

"공장 직원으로 계시면서 그런 열정과 실천력을 보이시다니, 나는 감동 받았어."

이강국은 박헌영의 지시를 수행하는데 서울에서 한 달이 걸렸다고 했다. 이강국은 소련측과 접촉하여 경성콤을 재건하고 있었다. 김수임은 그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다 알지는 못했다. 다만 이강국이 하고 있는 일은 독립운동이면서도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주의 운동이란 것 정도로 그녀는 알고 있었다.

불로하 강변에 울려퍼진 애국가

한편 중국의 다섯 학도병들은 불로하(不老何)라는 이름의 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글자 그대로 늙지 않는 강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일까? 아니면 사철 마르지 않는 강이기에 붙은 이름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그곳에 가서 애국가를 부르기로 했다. 

장준하와 김영록, 윤경빈, 홍석훈 그리고 새로 합류한 김준엽, 이 다섯 젊은이는 처음으로 지급받은 중국 군복을 입고는 날뛰듯이 즐거워했다. 그들이 환희에 차오른 것은 기어코 일본 군복을 벗어버렸다는 이유에서였다. 동이 트면서 짙은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향기로운 흙냄새와 청아한 아침 공기가 젊은이들의 얼굴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약속대로 옷을 모두 벗고 강물로 뛰어 들었다. 강물은 조금 차가웠지만 그리 깊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침 햇살이 강물 위에 부서지는 장면을 보며 발을 굴러 오르락내리락 해 보았다. 그들은 목욕을 끝내고 새 군복을 다시 입었다. 이제 떳떳한 조국의 아들로 거듭났다는 기쁨이 충만하고 있었다.

강물을 앞에 두고 일렬횡대로 나란히 선 다섯 젊은이는 조국이 있는 동쪽을 향해 경건히 머리를 숙였다. 그들은 두고 온 가족과 친구들을 잠시 생각했다. 고향 마을의 언덕과 냇물도 떠올랐다. 이윽고 그들은 머리를 들었다.

중국 불로하 강변에 한국 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비록 서양 노래에 가사를 붙인 애국가였지만 그들의 가슴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격으로 벅차올랐다. 장엄한 노래의 여운이 강물에 옮겨져 물살을 짓더니 강심으로 파고들었다. 젊은이들은 목매인 음성으로 산 설고 물 다른 이국의 강물 위에 조국의 언어를 전파하고 있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중경 임시정부를 향한 6000리의 여정

그들은 임시정부로 가는 6천 리의 여정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들었던 중국 군인들과 굳은 악수를 나눴다. 인자했던 중국 유격대 사령관에게는 깎듯한 거수경례를 올렸다. 일본군이 찾아와 학병 다섯 명을 내주면 포로로 잡아두고 있는 사령관의 부하 30명을 풀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정당하지 않은 거래에 응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사령관을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사령관이 붙여 준 안내인을 앞세워 황막한 광야에 발을 내디뎠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말이나 자동차가 있을 리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정표조차 없었다. 있다면 시한부 안내인과 두 다리뿐이었다. 그들은 무작정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을 향해 서쪽으로만 걸어갈 작정이었다.

안내인은 친절하고 총명했다. 그는 지세와 산세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얼핏 보아 시골 농사꾼 같았지만 의외로 박식하고 신실했다. 그들은 나흘 동안 쉬지 않고 걸었다. 안내인이 입을 열었다.

"삼십 리만 더 가면 진포선 철도가 나옵니다."

진포선은 텐진에서 시작되어 포구까지 가는 철도라고 했다. 문제는 철도를 넘어가는 일이었다. 철도는 언제나 일본군의 경비가 삼엄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일본군 초소가 있다고 했다. 초소를 통과하지 않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안내인은 말했다.

그들은 철도를 건너는 준비를 위해 사흘 정도 한 농가에 머물렀다. 사흘 후에 철도 너머에 장이 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안내인의 주도로 사흘 동안 철저히 장꾼으로 위장했다. 안내인은 자루와 망태와 밀짚모자와 농군의 옷가지 등을 가져왔다. 그리고 뺀대라고 하는 지게 비슷한 것도 구해 왔다. 젊은이들은 안내인에게 뺀대를 메는 방법을 배웠다.

출발하는 날 아침 안내인은 세 명의 진짜 중국 장꾼을 데려왔다. 그들은 일군 경비병이 말을 걸어올 때의 해결사였다. 그들은 장꾼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간을 택해 집을 나섰다. 중국말을 잘하는 김준엽을 앞에 세우고 나머지 네 사람은 장꾼들의 사이사이에 끼어 들어갔다.

"성공할 것이오."

안내인은 확신조로 말했지만 젊은이들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초소에 다다르면 분산하여 통과할 수밖에 없으니, 통과 후 2마일 정도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중국 장꾼들은 아무런 표정이 없이 눈만 떴다 감았다 하고 있었다. 맨 먼저 김준엽과 홍석훈이 중국인 장꾼과 함께 출발했다. 나머지는 먼발치 언덕 위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얼마 후 세 사람이 탈 없이 철도를 건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됐다."

마지막으로 장준하와 김영록이 초소를 통과했다. 일본 군인이 유독 장준하를 유심히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순간 장준하는 일본 군인이 뒷덜미를 낚아채는 것 같은 감촉을 느꼈다. 하지만 장준하는 몸을 조금 흔들며 태평스러운 걸음으로 철길을 건넜다. 그러자 일본 군인은 다음에 오는 사람에게로 눈을 돌렸다. 장준하는 고개를 숙여 보았다. 뛰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더 천천히 걸었다.

2마일 후 지점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긴장한 탓인지 심신이 눅진하게 쳐져 있었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고 싶었지만 장꾼들의 눈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들은 이 행사를 도맡아서 연출한 안내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세 사람의 중국 장꾼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젊은이들의 인사를 받았다. 아무런 생색도 없이 그저 할 일을 했다는 기색들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최소 60리를 더 걸어야 했다. 그래야 일본군의 관내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박은 아무리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그들은 한 사람 당 하루 다섯 통 정도의 수박을 먹으며 일주일을 걸었다. 그러고는 어느 중국군 부대에서 하루 묵은 뒤 다시 닷새 동안 밤에만 걸었다. 팔로군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불로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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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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