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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2년 전, 아내는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버스와 승용차가 정면으로 충돌하여 승용차에 탔던 4명의 일행 중 2명이 현장에서 사망한 사고였는데 그 속에서 아내는 기적처럼 살아난 것이다. 휴지처럼 구겨졌던 승용차만큼이나 엉망이 되어버린 몸이었지만 아내는 병원에서 외상 치료만 받은 채, 밀리는 입원환자 때문에 병실이 부족하다며 통원치료를 강요하는 병원 측을 이기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집으로 옮겨야 했다.

돌이켜보면 그 때 아내는 좀 더 전문적인 치료를 받았어야 했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 두어야 했다. 그러나 해직되어 생활능력이 없는 남편, 외상만 치료하면 되는 줄 알았던 남편의  무지와 무능 때문에 정신과 치료 등 전문적인 치료는 끝내 받지 못하고 상처만 봉합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내는 두 달도 쉬지 못한 채 살아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직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완치되지 않은 몸으로 머나먼 장흥 땅, 동승했다가 유명을 달리했던 동료들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학교까지 무리하게 통근했던 아내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만다. 그때 아내는 날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뒤늦게 내가 특별 채용 형태로 복직을 했지만 아내는 그만 두지 않았다. 이미 고등학생이 된 두 아들의 뒷바라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의 깊은 병을 보지 못하고 물질적인 이해득실만을 계산하며 안도 했던 10년이었다.

아내의 병이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처음에는 갱년기 증후군으로 의심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일은 두고두고 미안한 일이다. 그렇다고 그동안 병원을 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지역의 대학병원, 종합병원, 한방 병원은 물론 서울의 종합 병원도 몇 군데 거치고 심지어 민간요법에 의한 치료까지 받았으나 아내의 병은 낫지 않았다. 병원마다 진단과 처방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내에 대한 의사들의 이해 부족이 더 큰 문제였다고 본다.
뜨락 옆의 울창한 송림 그곳에 오르면 마을과 이따금 기차가 다니는 굽은 철길이 보인다.
▲ 뜨락 옆의 울창한 송림 그곳에 오르면 마을과 이따금 기차가 다니는 굽은 철길이 보인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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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판단으로 아내의 병은 교통사고 후유증이 아닌가 한다. 사고당시 조수석 뒤에 앉아 있던 아내는 차에서 튕겨나가 도로가의 옹벽에 부딪치고 다시 도로 바닥에 떨어지는 부상을 입었는데 그 부상의 후유증이 갱년기 증상과 함께 나타난 것 같다는 판단이다.

아내가 직장을 그만 둔지 3년째다. 그리고 아내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농부(農婦)가 되었다. 도시에서 낳고 자란 탓에 호미를 잡아 본 적 없는 아내는 귀향을 꿈꾸는 남편을 따라 뙤약볕에서 잔디밭의 풀을 매고 채소밭을 일구는 농부가 된 것이다.

이제 아내는 계절에 따라 무엇을 심고 어떻게 가꾸는지 안다. "남의 머릿속의 글도 배우는데 보고하는 농사 못 배울 것 있겠느냐"고 우리를 격려해주던 이웃 아주머니의 말대로 그동안 농사에 관해 많은 것을 보고 익혔다. 그리고 아내는 온갖 채소와 고구마, 야콘, 옥수수, 감자를 심고 가꾸는 동안 농작물의 가치를 다시 보게 된 것 같다. 이제 시장에서 채소의 값을 깎거나 더 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하기 때문이다.

작은 쉼터 절구통과 물확을 배치하여 쉼터를 만들었더니 찾아온 친구들마다 매우 좋다고 한다.
▲ 작은 쉼터 절구통과 물확을 배치하여 쉼터를 만들었더니 찾아온 친구들마다 매우 좋다고 한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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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일은 협동이다. 농작물을 심고, 풀을 매고, 수확을 하는 전 과정을 아내와 협동 없이 해낼 수 없다. 아내와 나의 공동목표가 분명해진 것이다. 공동의 목표를 향해 아내와 손발을 맞추면서 나는 평화와 공존의 의미를 다시 새기고 있다. 농사일뿐 아니라 매사가 상하 좌우의 협력 없이 이룰 수 없다는 사실도 되새기고 있다.

이제 농사는 아내와 나의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심는 과정에서부터 수확하여 먹을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많은 이야기를 한다. 벌레가 먹어버린 배추밭의 안타까움 불과 며칠 새에 자란 무와 시금치를 보면서 농작물과 자연 환경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그것을 먹으면서 농작물의 달콤한 맛에 우리가 기른 것이라는 보람을 양념으로 비벼 먹는다.

고구마가족  세상 밖으로 나온 고구마 가족을 보며 땅의 조화에 놀라다. 아내는 흐뭇해 했다.
▲ 고구마가족 세상 밖으로 나온 고구마 가족을 보며 땅의 조화에 놀라다. 아내는 흐뭇해 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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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가족 2 서로 헤어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넝쿨에 달려나온 고구마 가족.
▲ 고구마 가족 2 서로 헤어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넝쿨에 달려나온 고구마 가족.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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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일요일(10월 26일) 야콘과 고구마를 캤다. 도저히 우리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 세 사람이나 불렀음에도 꼬박 하루가 걸리는 일이었다. 가물었던 탓인지 고구마나 야콘의 소출은 작년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었다. 더구나 고구마는 땅속 깊이 숨어버린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경운기로 갈아엎어야만 했다.

그 바람에 캐낸 고구마는 부러지고 상처 난 것이 절반을 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상품화하겠다는 계획이 없었으니 우리가 먹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 같다. 그중에서 성한 것을 골라 종이상자에 담아 방구석에 쌓아두니 보고만 있어도 흐뭇하고 옛날 시골집의 향수를 느낄 수 있어 좋다.

야콘은 좋은 것을 골라 10kg씩 담아 12박스를 판매했다. 우리가 농사짓기 시작한 후 최초의 수입이었다. 묘목대금과 인건비를 제하면 남는 돈은 고작 6만원이었지만 아내는 큰돈이나 만진 것처럼 "오지다!"고 했다. 그 순간은 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한 달만 나가면 웬만한 농사벌이보다 많다고 했던 아내의 비교개념이 멈춘 듯 했다.

무밭 김장할 날은 아직 멀었는데 무는 생채를 해먹을 수 있을만큼 자랐다. 무는 벌레들에게도 강했다.
▲ 무밭 김장할 날은 아직 멀었는데 무는 생채를 해먹을 수 있을만큼 자랐다. 무는 벌레들에게도 강했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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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가 생산한 농작물을 돈으로 환산하면 그 가치는 말하기 민망해진다. 그러나 농작물을 심고 가꾸는 동안 우리가 얻는 기쁨과 농작물을 수확하는 보람은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동안 여러 자료나 책에서 녹색의 숲이 두통이나 아토피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기록을 본적이 있다. 또 불치판정을 받은 암도 자연의 숲에서 치료했다는 말도 들었지만 솔직히 나는 '그럴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만 했을 뿐 아내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아내는 어떤 치료도 받지 않고, 약도 먹지 않음에도 2년 전 농사를 시작했던 시기에 비해 매우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통증을 호소하는 정도를 비교해도 발병 초기는 물론 금년 초에 비해서도 덜한 것 같고, 내가 걱정할 만큼 밭의 김을 매는 등 많은 일을 하지만 예전처럼 피로감을 덜 느낀다는 사실이다. 본인도 몸이 예전과 다르다는 말을 많이 한다.

아내가 좋아진 원인은 그동안 받았던 각종 치료효과 일 수 있다. 혹은 시간에 따른 자연 치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깨끗한 땅에서 완전한 유기농으로 농사지은 작물을 년 중 먹을 수 있던 점도 아내와 나의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비록 정확한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녹색 식물을 심고 기르는 과정에서 본인이 느끼지 못한 가운데 치료효과를 보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즉, 농작물을 심고 가꾸면서 신선한 산소를 호흡할 수 있었던 점도 그렇지만 그것들이 자라는 과정을 보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되찾는  효과가 더 컸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만약 내 추정이 틀리지 않다면 가까운 텃밭에서 아내의 건강을 찾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나도 정확하게 모르는 '숲의 치료', '녹색심리치료', 혹은 '식물 심리치료'라는 용어를 들먹였더니 아내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 시장에서 사온 채소와 우리 밭에서 기른 채소를 씻을 때의 감촉부터 달랐던 경험이며 먹을 때의 기분을 이야기 한다. 그런 아내를 보며 아내의 병도 내년이면 치유되리라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아내의 건강을 얻었다는 점에서 지난 1년이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을 붉은 길 봄의 꽃길은 다시 붉은 깋ㄹ이 되었다. 가을을 담은 당산나무와 뒷산의 풍경이 어우러진다.
▲ 가을 붉은 길 봄의 꽃길은 다시 붉은 깋ㄹ이 되었다. 가을을 담은 당산나무와 뒷산의 풍경이 어우러진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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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과 집착을 희망이라고 우겼던 세월이었다.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만이 대의요 가정과 자녀의 문제는 아내의 차지라고 여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요즘 나는 비록 늦었지만 내 가족이 소중한 가치요 희망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고 있다.

아직 할 일은 많이 남았다고 본다. 우선 아내와 나의 건강을 완전하게 회복하는 것도 그렇지만 아직도 공부만하는 두 아들의 취업과 결혼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삶이 조금은 답답하더라도 몇 년 안에 두 아들이 일자리를 잡고 각자의 길을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 우리의 뜨락이 정식 이름을 갖고 과일 나무들에서 과일을 딸 수 있으리라는 꿈이 있기에 아내와 나는 삶이란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서로 위로하며 산다.

뜨락의 이름은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일단 아내와는 하심원(下心園)으로 의견을 모은 상태이다. 마음의 짐을 부려놓을 수 있는 정원을 의미하지만 연말까지는 더 좋은 의미를 가진 이름을 찾자고 했다. 호적에 올릴 이름도 아니고,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니니 급할 것 없을 것이다.

요즘은 뜨락에 어울리는 집을 짓고 한쪽에 서하당(棲霞堂)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자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늙는 꿈을 꾼다. 그렇게 끝을 맺는다면 여생이 그렇게 후회스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마음을 비웠다고 하면서 그런 꿈을 이야기하고 건강하기를 바란다면 그것도 하나의 욕심일 수 있으리라. 그러나 가족의 건강과 뜨락의 아담한 집만큼은 욕심이라는 말을 들어도 좋으니 꼭 실현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오늘은 비닐하우스 안에 심은 고구마를 캤다. 30여수밖에 되지 않기에 나는 낫으로 줄기를 쳐내고 아내는 호미로 고구마를 캤다. 바깥에 자란 고구마와 달리 캐기도 쉬웠을 뿐 아니라 의외로 수확도 많았다. 고구마 캐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며 나에게 다른 일은 하란다. 즐거워하는 아내를 말릴 수 없었다. 주렁주렁 줄기에 달려나오는 고구마와 땅속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고구마 가족의 모습만 사진에 담았다.

무와 배추를 뽑아 김장하는 일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고, 다음 주에는 오늘 베어둔 콩만 털면 두 주일쯤은 한가할 것 같다.

아내가 잡은 풍경  멀리 나무 밑에 자란  풀을 매는 모습을 찍어주면서 그림이 좋다기에 올렸다. 과연 그림이 좋기는 한 것일까?
▲ 아내가 잡은 풍경 멀리 나무 밑에 자란 풀을 매는 모습을 찍어주면서 그림이 좋다기에 올렸다. 과연 그림이 좋기는 한 것일까?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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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과 함께 한지 2년, 보리수와 앵두를 맛보는 것으로 시작한 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가을이 깊어진 것 같다. 여름내 힘들게 했던 풀들은 시들고, 빨갛게 물든 나뭇잎들도 낙엽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얼마 후면 나무들은 남김없이 자신을 비우고 새로운 꿈을 꿀 것이다. 뜨락의 농작물과 나무의 일생을 보며 내년에 올 우리의 삶과 꿈을 다시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2년째 농사를 지으며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꼈다. 매사에 때를 놓치지 않아야한다는 사실, 그러면서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은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 현실임을 안 것도 큰 배움일 것이다. 특히 아내의 변화를 보면서 노동과 치유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한다. 이 글은 한겨레 필통에도 옮긴다.



#전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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