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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이 미국발 금융위기의 광풍에 휩싸이며 길을 잃었다. '신뢰의 위기'다. 진작에 신뢰를 잃고 이제 정권이양을 앞두고 있는 부시 대통령이 해결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공은 11월 4일 새로 선출될 미국 대통령에게로 넘어갈 것이다. 미국이 어떤 지도자를 선출할 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다. 미국 대선 격전지를 취재하고 돌아온 KBS 1TV '특파원 현장보고'팀의 박성래 기자가 취재후기를 보내왔다.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생한 분위기를 토대로 대선 전망은 물론 방송에서 다루지 못한 다양한 뒷이야기들을 다룰 예정이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이를 연재한다. [편집자말]
ⓒ 오마이뉴스

미국의 오하이오는 우리나라로 치면 충청도 같은 곳이다. 오하이오에서 지는 대선 후보는 진다는 게 정설처럼 돼 있다. 지난 100년 동안 오하이오에서 지고도 대통령이 된 후보는 공화당에선 단 한 명도 없었다. 민주당의 경우도 2명뿐이었는데 194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1960년 존 F. 케네디가 그런 경우였다.

루스벨트는 당시 오하이오 주지사였던 존 브리커가 상대편의 부통령 후보로 나왔기 때문이었는데 그래도 득표율 차이는 0.37%에 불과했다. 0.37%를 지든 몇 %를 지든 승자독식 규정에 따라 패배한 후보는 오하이오에 배당된 선거인단 20명을 상대에게 넘겨줘야 한다.

오하이오 주립대 폴 벡 교수에게 이유를 물으니 '오하이오는 미국 선거의 축소판(microcosm)'이란다. 도시 인구와 농촌 인구가 6대4 정도로 나누어져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미국 선거에 등장하는 다양한 그룹들의 비율이 미국 전체의 통계수치와 비슷하기 때문에 오하이오가 미국을 고스란히 대표한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오하이오는 대표적인 '스윙 스테이트'(부동층 주)로 지난 2000년과 2004년 승부를 갈랐다.

오하이오가 미국을 대표한다면 미국 전체가 오바마 대세론으로 기우는 와중에서 오하이오 역시 기울고 있을까?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오하이오가 미국 전체 통계와 크게 차이 나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바로 올 대선의 중대 변수인 인종 구성이다.

오하이오는 백인인구가 87%로 미국 평균보다 20% 정도 높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올초 민주당 오하이오 경선에서 오바마는 힐러리에게 참패했다. 88 개 카운티(군) 가운데 83군데서 졌다. 오하이오는 끝까지 예측을 불허하는 진정한 스윙 스테이트다.

진정한 스윙 스테이트 '오하이오'... 새로운 변수 '조기투표'

 미국에서 '조기 투표'란 일종의 부재자 투표로 이유 불문하고 자신이 원하면 할 수 있다. 하루뿐이던 투표일이 사실상 한 달 정도로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 사진은 한 미국인이 투표하는 모습.(자료사진)
미국에서 '조기 투표'란 일종의 부재자 투표로 이유 불문하고 자신이 원하면 할 수 있다. 하루뿐이던 투표일이 사실상 한 달 정도로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 사진은 한 미국인이 투표하는 모습.(자료사진) ⓒ 한나영

그런 오하이오에서 올해 처음으로 '조기 투표'가 시작됐다기에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곧바로 차를 몰았다. 워싱턴 D.C.에서 10시간을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주도 콜럼버스.

콜롬버스가 속해 있는 프랭클린 카운티는 스윙 스테이트 오하이오에서도 오락가락하는 '스윙 카운티'다. 오하이오 북부 클리블랜드는 민주당 성향, 남부 신시내티는 공화당 성향이 강한데, 주도 콜롬버스는 위치상으로도 중간이고 투표 성향상으로도 중간이다.

'조기 투표'란 일종의 부재자 투표다. 보통의 부재자 투표는 투표일에 사정이 있어 투표를 못한다는 이유를 대야 하는 데 반해, 조기 투표는 이유 불문하고 그냥 자신이 원하면 할 수 있다. 하루뿐이던 투표일이 사실상 한 달 정도로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조치다.

특히 유권자 등록 기간이 끝나기 직전 일주일 동안에는 유권자 등록과 동시에 투표까지 마치는 '당일 투표'도 가능하다. 종전에는 유권자 등록을 먼저 하고 투표날 투표를 따로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젊은이들이나 흑인들의 투표율이 매우 낮았다. 유권자 등록을 해놓고도 투표는 안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조기투표의 도입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젊은이들과 흑인들을 최대한 투표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핵심 전략으로 삼은 오바마로선 호재 중의 호재다.

오바마가 직접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 오하이오 총동원령을 내렸다. 2004년 당시 존 케리가 선거구당 겨우 9표 차로 아깝게 졌다면서 이번에 시작된 조기투표에 반드시 나서달라고 신신당부한다.

오바마는 직업이 변호사지만 소송은 거의 맡은 적이 없다. 대신 흑인 유권자 등록 운동을 주로 했다. 힐러리와의 경선에서 승리한 것도 새로운 유권자를 대거 등록시킨 덕분이다. 힐러리가 누군가? 민주당 주류 중의 주류다. 민주당의 조직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그대로 경선에서 맞붙으면 백발백중 패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힐러리는 민주당 조직이 강한 주들은 거의 이겼다. 반면 오바마가 이긴 주들은 대부분 공화당 당세가 강한 주들이었다. 오바마는 민주당 조직이 약한 주에서 흑인들과 젊은이들을 '오픈 프라이머리'(개방형 예비경선)에 대거 끌어들임으로써 겨우 이길 수 있었다. 민주당 경선 참여자가 4년 전에 비해 몇 배나 늘어난 이면에는 이런 사정이 숨어 있다.



오바매니아, 오하이오로 집결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조기투표장이 마련된 프랭클린 카운티 재향군인회관. 마치 장이 선 것 같았다. 승합차들이 줄지어 도착하더니 사람들을 토해냈다. 내린 사람들은 젊은이들 아니면 흑인들이었다. 젊은이들은 대개 대학가에서, 흑인들은 빈민가나 노숙자 쉼터에서 오는 길이었다. 특히 흑인 노숙자들 태반은 투표라고는 난생 처음 하는 사람들이다.

백이면 백, 오바마 쪽이다. 자원봉사자들이 자기 차를 끌고 와서는 공짜 셔틀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떤 차는 '조기 투표 택시(EARLY VOTE TAXI)'라는 글씨까지 붙이고 다녔다. 오바마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자기 차를 가지고 봉사하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운전할 사람이 더 필요하다, 차가 더 필요하다, 기름값은 자신이 대겠다는 글들이 올라와 있다.

투표하러 온 흑인 노숙자들은 인터뷰는 물론 촬영도 거부했다. 운전을 하는 자원봉사자를 인터뷰할 수밖에 없었다. 오바마를 돕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극구 손사래를 친다. 자신들은 투표율 높이기 운동을 하는 것일 뿐 정치적으로는 중립이란다. 그러나 카메라가 꺼지자 한 명이 다가와 귓속말로 일러준다. 이렇게 차로 실어온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오바마를 찍지 않겠느냐며 빙긋 웃는다.

정말 놀라운 건 셔틀 운전사들의 출신. 내가 만난 이들 가운데 오하이오 주민은 반도 안 됐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친구랑 같이 왔다는 아저씨, 뉴욕에서 차를 몰고왔다는 뮤지션 등등…. 오하이오는 선거 때문에 생전 처음 와봤다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주들은 오바마가 이길 게 뻔하기 때문에 격전지 오하이오에 와서 돕고 있는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대학원생 2명은 두 달 전부터 오하이오에 와 있단다. 이런 사람들이 수천 명이란다.

수천 명, 크게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 전주 뉴욕 맨해튼에서 다른 격전주에 파견할 자원봉사자들의 모임을 취재한 적이 있다. 한국계를 포함한 아시아계 미국인 모임이었는데 족히 백 여명은 넘어 보였다.

오바마 캠프에서 나왔다는 백인 여성이 이들을 교육하고 있었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오바마 운동원처럼 보이지 말라, 중립적인 투표율 제고 운동으로 가장하되 오바마를 찍을 것 같은 사람들을 골라 등록시키라. 오하이오에서 만난 사람들도 비슷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이들은 교육받은 대로 충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아무런 대가도 없는데 말이다. 오바마 진영의 조직력과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비 전략적인 흑인과 전략적인 흑인

 26일(현지시간) 오후 오하이오주의 주도인 컬럼버스시 재향군인회관에서 실시되는 조기투표의 한 장면. 미국 사회의 비주류인 흑인과 유색인종의 유권자들이 대거 눈에 띈다.
26일(현지시간) 오후 오하이오주의 주도인 컬럼버스시 재향군인회관에서 실시되는 조기투표의 한 장면. 미국 사회의 비주류인 흑인과 유색인종의 유권자들이 대거 눈에 띈다. ⓒ 연합뉴스

투표를 마치고 나온 흑인들의 표정엔 생기가 넘쳤다. 덩실덩실 춤을 추듯 걸어 나와 오바마를 찍었노라고 자랑한다. 하지만 일부 흑인들은 극도로 말을 아꼈다. 누구를 찍었느냐고 묻자 비밀이란다. 장난이 아니라 정말 진지한 표정이다. 흑인들이 오바마에게 몰표를 던지는 것처럼 비치면 절대다수인 백인들이 매케인 쪽으로 결집할까 봐 조심, 또 조심하는 것 같았다.

이런 걱정이 근거 없지는 않을 것이다. 보수 성향의 폭스 TV는 오바마를 찍고 나왔노라고 큰소리로 자랑하는 흑인들의 인터뷰를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백인 보수층에게 '생각 없는 흑인들이 저렇게 날뛰는데 너희들은 뭐하고 있느냐'고 꾸짖는 것 같았다.

이번 취재의 특징이 그런 것이었다. 어디서 무엇을 취재하든 실마리 하나를 붙들고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결국에는 인종문제가 나온다. 아무도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모든 것의 이면에 깔려 있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거대한 벽이다.

매케인 쪽 집회에 가 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매케인을 지지하는 모터사이클 동호회원들(BIKERS FOR MCCAIN)의 집회였는데 200명 남짓한 참가자 가운데 흑인 1명만 빼고는 모두 백인이었다. 매케인의 딸, 메간이 온다고 해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가죽 조끼에 가죽 바지를 입은 백인 남자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말했다.

"걔는 급진적 진보야(He is ultraliberal)."

누가 봐도 오바마 얘기다. 다른 남자가 맞장구를 쳤다. 내가 옆에 있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둘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이들에게는 '진보(liberal)'만 해도 상당한 욕인데 그 앞에 '급진적(ultra)'까지 붙었다. 거의 용서받지 못할 구제불능이란 소리다. 여담이지만 미국에서 진보를 뜻하는 '리버럴'이란 말은 점점 경멸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진보주의자들은 자신을 '리버럴'이라고 부르면 기분 나빠한다고 한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보수라는 말이 '꼴통'이라는 느낌을 주던 것과 비슷하다.

1980년 이후 민주당의 치세가 클린턴 8년뿐이었다는 사실은 이와 무관치 않다. 미국의 진보 진영은 60년대 히피 같은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들에게는 미국적인 가치를 무조건 파괴하려 드는 사람들이란 낙인이 찍혀 있다.

화장실에서 일어난 일은 아주 상징적이다. 오바마 지지자든 매케인 지지자든 모두들 오바마에 대해 말할 뿐 매케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오바마 지지자들은 오바마를 찬양하고 매케인 지지자들은 오바마를 비난한다는 것뿐이다.

마이크를 들이대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매케인 지지자들은 왜 매케인을 지지하는지 이유를 대지 못한다. 몇 마디 주섬주섬 얘기하다가 결국 오바마 얘기로 넘어가 버린다. 오바마가 경험이 부족하다거나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거나 세금을 왕창 올릴 거라는 얘기들이다. 오바마가 이번 선거의 담론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얘기다.

매케인이 직접 등장하는 집회에 가봐도 마찬가지다. 청중들이 외치는 구호는 대충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USA'고 다른 하나는 'NOBAMA(NO+OBAMA)'다. 내가 보기엔 황당한 구호들이다. 매케인이 외국인 후보와 맞붙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오바마는 미국인이 아니란 말인가?

이들이 외치는 'USA'는 '인종의 용광로 USA'가 아니라 '백인의 나라 USA'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바로 뒤에 'NOBAMA'라는 구호가 따라나오면 의심은 더욱 짙어진다. 문장으로 만든다면 이쯤 될 것이다. '백인의 나라 USA를 흑인 오바마에게 빼앗길 순 없다.'

누가 뭐래도 미국인의 절대다수는 백인이다. 거의 70%에 가깝다. 백인이 뭉칠 수만 있다면 흑인 대통령은 불가능하다. 오바마 대세론이 확산될수록 백인들이 결집해 대거 투표장으로 몰려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게 이번 대선의 마지막 변수라면 변수다. 정말로 그렇게 될까?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다음으로 넘기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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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박성래 기자는 KBS 국제팀 소속으로 한국 대선과 미국 대선을 각각 2차례씩 취재했다. 저서로는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김영사, 2005)와 최근에 출간한 <역전의 리더, 검은 오바마>(랜덤하우스)가 있다.



#오바마#매케인#미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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