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내의 당부

엊그제 아내가 볼 일을 보고자 서울로 나들이 가면서 나에게 단단히 일렀다.

“여보, 텃밭 호박 넝쿨에 계란만한 애호박이 두어 덩이가 달려 있으니까 내일 아침에 꼭 따 두세요. 요즘은 때를 놓치면 묵힐 수도 없어요.”

 가뭄에도 올망졸망 열매를 호박
가뭄에도 올망졸망 열매를 호박 ⓒ 박도
오늘 아내가 온다는 전화를 받고서 그제야 그 말이 퍼뜩 생각나 바구니를 들고 텃밭으로 갔다. 넝쿨을 들추자 이 가뭄에도 호박은 꽃을 피우고, 올망졸망 열매를 맺기에 한창이었다.

잠깐 새 주먹 크기만한 애호박 네 덩이를 땄다. 요즘 산골마을은 가을 가뭄이 어찌나 심한지 텃밭에는 물기가 전혀 없고 밭고랑을 밟으면 그대로 흙이 푹 내려갔다. 이런 가뭄에도 시들지 않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호박이 여간 고맙지 않았다.

나는 애호박을 따면서 흙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내가 참 염치없는 사람으로 몹시 부끄러웠다. 올 봄에도 텃밭에다 호박을 비롯한 고추 오이 가지 등 남새를 잔뜩 심어놓고는 그동안 열심히 가꾸지 못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호남지방 의병전적지 답사 다닌다고, 그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엮는다고, 또 올 연말에 나올 새로운 신간 원고를 쓴다고 텃밭을 팽개치다시피 돌보지 않았다.

아내가 그동안 남새를 심어만 놓고 돌보지도 않는다고 잔소리를 하다가 지쳤음인지 이즈음에는 아예 제쳐두고 혼자 텃밭을 가꾸면서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싱싱한 푸성귀를 밥상에 부지런히 올렸다. 올해는 텃밭 농사가 잘돼 호박잎과 오이, 가지, 풋고추는 입에 물리도록 실컷 먹었다. 애호박을 따오고서는 미안한 마음에 물뿌리개로 물을 주자 호박도 고추도 파도 조금도 옆으로 흘리지 않고 꿀컥 꿀컥 흔적도 없이 들이켰다.

 애호박 네 덩이
애호박 네 덩이 ⓒ 박도
오늘 텃밭에서 애호박을 따면서 세상의 자식들이 아비보다 어미를 소중히 여기는 까닭도 알았다. 대체로 남성들은 아무 데나 씨를 뿌리려 하거나, 온갖 달콤한 말로 여성을 유혹하여 밭에다 씨만 뿌려 놓고는 돌보지 않기 일쑤다.

이와는 달리 여성들은 자기 밭에 돋아난 씨앗들을 주리 끼고 애면글면 평생을 산다.  

물뿌리개로는 남새들이 감질이 날 것 같아 뒤뜰의 호스를 꺼내 수도꼭지에 연결하여 한바탕 뿌려주는데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기어이 단비를 뿌렸다. 한바탕 단비가 쏟아지자 내 집 텃밭의 남새뿐 아니라, 앞집 노씨네 밭 배추들도 금세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는 하늘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듯했다.

심거나 가꾸지도 않고 열매만 따 먹는 사람

몇 해 전, 6 ‧ 10 항쟁에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가 대담 중, 가슴 속에 담은 한 말씀을 쏟으시는 게 떠올랐다.

“‘얌체(염치) 있게 살자’를 말하고 싶네요. 한 마디로 사람들이 너무 얌체가 없어요. 정치인이건 경제인이건 정부건 사회건 얌체 있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부질없이 남을 탓하거나 자기 과시하거나, 그리고 정치모리배들의 얌체 없는 짓 때문에 나라가 엉망진창 아닙니까?

기본 양심도 없이 자기 부만 축적하겠다는 얌체족들이 너무 많아요. 씨앗을 뿌리거나 심거나 가꾸지도 않고 열매만 따 먹는 것도 얌체 없는 짓이지요, 아무튼 얌체 있는 사회가 돼야지요.”

 호남제일의 심남일 의병장
호남제일의 심남일 의병장 ⓒ 눈빛
 심남일 의병장 며느님과 손자
심남일 의병장 며느님과 손자 ⓒ 박도

사실 정의 사회란 거창한 게 아니다. 씨를 뿌리거나 그 작물을 가꾼 사람이 거둬들이는 게  정의 사회다. 나는 10년째 국내외 항일유적지를 더듬으면서 독립지사나 의병 후손을 만날 때마다 울분을 느끼는 것은 해방의 씨를 뿌리거나 가꾼 이는 여태 주변인으로 남의 머리나 감겨주고 남의 밥집에서 설거지나 하거나(보성 안담살이 의병장 후손), 청각장애인으로 아흔의 어머니와 쓸쓸히(심남일 의병장 후손)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텃밭에서 그동안 제대로 가꾸지도 않고 애호박만 따는 내가 바로 염치없는 사람이었다.

덧붙이는 글 | 호남의병 전적지 답사기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신간이 도서출판 '눈빛'에서 지금 막 태어났습니다.



#애호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