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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날을 하얗게 밝혀봤네요. 지난여름 한동안 그랬는데 합격했다는 소리에 참 좋네요. 아, 제주에 있는 딸네미에게 전화 했더니 별 것도 아닌 것을 갖고 호들갑을 떨어 온 식구가 난리가 났네요."

지난 27일 전남도교육청 홈페이지에서 윤순자 할머니의 고입자격 검정고시 최종 합격자 명단을 보고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합격 소식을 접한 집안 분위기를 전하는 할머니는 다소 상기된 목소리였다.

올해 나이 67세, 남해바다 가운데 떠있는 화태도에서 평생을 생활하신 분이다. 4남매를 올곧게 길러 각기 모두 대처로 보냈다. 지금은 할아버지와 단 두 분이 생활하신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중학교 진학의 꿈을 접은 지 50년도 더 지나서, 변변한 지도를 받기 어려운 작은 섬마을에서, 콩밭 매며 틈틈이 쪽지 훔쳐보며 공부해 중학교 졸업 자격을 얻었다.

 윤 할머니의 합격을 알리는 홈페이지 화면
윤 할머니의 합격을 알리는 홈페이지 화면 ⓒ 김치민

할머니가 평생을 가슴에 묻어둔 중학교 졸업의 꿈을 꺼낸 것은 올해 초였다. 지난해 여름 컴퓨터 사용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알아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생소한 알파벳부터 인터넷 관련 용어들, 디지털 사진 다루기 등.

세월이 가르쳐준 경험 덕에 책 읽기에 자신감 생겨

배우는 것이 어려웠지만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이런 저런 공부를 하는 동안 50여 년 전에 할머니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었던 중학교 진학의 꿈이 되살아난 것이다. 학교 선생님에게서 동네 중학교 진학 권유를 받기도 했지만 선뜻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제부의 고입 검정고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솔깃했지만 자신 없어 고개만 살래살래 저었다. 하지만 소녀시절의 설렘은 계속되었고, 결국 제부와 딸이 가져온 온라인 강의 수강권과 교재를 받았다.

시작이 반이라 했던가? 온라인 강의에 등록하고 컴퓨터를 켰다. 50년이 넘도록 성경책 외엔 이야기 책 한 번 들여다보지 않았던 터라 동영상 강의가 귀에 설었다. 화면 속 선생 이야기가 획획 지나가는 통에 속상한데 걸핏하면 컴퓨터가 말썽을 부렸다. 돋보기 걸치고 교재를 몇 번이나 읽고 나서야 글자들이 머리에 들어왔다. 그러는 사이 두 달 훌쩍 지났다.

아직 공부하는 모습이 할머니에게는 설었다. 남 보기에 부끄러울 것은 없지만 왠지 쑥스러웠다. 4월 시험은 경험 삼아 본다고 얘기 했지만, 내심 도덕과 사회에 합격하는 것이 목표였다. 세월이 가르쳐준 이야기를 더듬으며 책을 읽다보니 어렴풋한 자신감도 생겼다.

첫 번째 시험 날. 데려다 준다는 걸 한사코 마다하며 나섰지만, 순천 구석에 있는 시험장을 찾느라 아침 내내 어지러웠다. 할아버지의 안타까워하는 타박이 싫지는 않지만 늘그막에 이 무슨 창피냐 싶기도 했다. 두 달 동안의 공부가 헛공부는 아니었나 보다. 제법 높은 점수로 도덕과 사회를 합격했다. 늦게 시작한 공부라 남들 눈치가 보였는데 제법 자신감도 생겼다.

국어와 과학 합격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이제 네 과목이 남았다. 시간도 4개월이다. 영어와 수학은 엄두가 나지 않지만 국어와 과학은 해볼 만하다. 국어는 중학생이 알아야 할 문법을 정리한 책을 보고, 온라인 교재를 공부했다. 과학 교재를 폈다. 알지 못할 기호들이 가득하다. 작은 쪽지에 원소기호랑 외워야 할 것들을 정리해 몸빼 주머니에 넣고 밭고랑을 더듬었다.

간간이 쪽지를 꺼내 입으로 우물거리며 외우다 보면 벌써 해가 저문다. 돌아오는 길에 흙이 잔뜩 묻은 쪽지를 버리며 다시 외우기를 몇 번. 그래도 과학 교재 속의 내용들은 미꾸라지 마냥 쏙쏙 잘도 도망갔다. 무더운 여름날 빙 둘러 바다인 섬마을도 열대야는 도회지나 한가지였다. 선풍기 안고 하얗게 밤을 새웠다. 혼자 밤을 지키는 것이 어제 오늘일이 아니었지만 올 여름은 시험공부 하느라 서러운 것도 몰랐다.

여름 한 가운데 8월 초, 더운 여름에 한겨울 사시나무 떨듯 시험을 치렀다. 처음과는 달리 한사코 사양해도 제부와 동생은 칙사 대접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모시고 오갔다. 황송하고 미안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이번 시험에서는 국어와 과학을 합격하는 것이 목표였다. 시험이 끝났다. 그리 잘 본 것 같지는 않지만 합격권에는 들 것 같다. 만일에 대비해 좀 엄살을 부렸다. 다음 시험이 내년 4월쯤이니 시간이 사뭇 많은 듯하다. 무슨 일들이 그렇게 많고 바쁜지 나머지 과목 공부 시작도 못하고 날짜가 훌쩍 지났다.

"할머니 축하합니다. 고입검정고시에 최종 합격했네요."

가슴이 뛴다. 합격이라니? 두 과목 합격이 아니라 최종 합격이라니?

여군에 지원하려 했지만 학력 미달로 지원조차 못해

할머니는 동생들을 돌보면서 간신히 초등학교를 마쳤다. '쌤통'을 부리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여군에 지원하려고 했지만 지원 자격이 중졸이상이었다. 학력 미달로 지원조차 못했다. 시간이 지나 결혼하고, 아이들 학교 보내면서는 아이들 공부 잘하는 것이 그저 좋았을 뿐이었다. 언제나 바쁜 신랑과도 가슴 속 애달픈 얘기를 차마 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모두 성장해 각기 제 할 일을 찾아 대처로 나가고, 할아버지는 여전히 분주하게 섬을 들락거린다. 집 주변의 뙈기밭에 콩, 옥수수, 채소 등을 심어보지만 결국은 소일거리일 뿐이다. 마을 친구, 친척들과 살갑게 살면서 잊었던 가슴 속 응어리를 들춰내준 사람들이 고맙다.

할머니 주머니 속 전화기가 온종일 울었다고 하신다. 어쩌면 긴 세월 삼켰을 할머니의 울음을 전화기가 대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새로운 꿈을 꾼다. 글을 쓰고, 영어를 더 공부하시겠다고 하신다. 아직 얼떨떨하고, 별 것 아닌 것을 갖고 사람들이 호들갑을 떤다고 말씀하시는 행간에 웃음이 가득하다.

"할머니! 고졸자격 검정고시에 도전하셔야죠?"
"허, 거참! 내 영어, 수학을 공부해서 좋은 점수로 합격하고 싶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고요. 영어 공부는 계속할랍니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힘차다.

 선착장 양식장에서 전복을 따는 윤 할머니
선착장 양식장에서 전복을 따는 윤 할머니 ⓒ 김치민

그날들이
윤순자 할머니 글쓰기 노트 중에서

어제 오늘은 날씨가 맑았다. 흙에 물이 좀 빠졌을 만 해서 꽃무늬몸빼, 흰고무신, 호미들고, 모자쓰고 밭으로 나가봤다. 고구마 몇고랑 심어 놓은것이 쫑들 쫑들 예쁘게도 살아있다.

이랑에 있는 잡초들을 다 매 놓고 돌아 보니 너무 좋았다. 김을 매 주고나서 곡식 보고 섰을 때 시원하고 상쾌한 그 기분 직접 해보지않은 사람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농사하는 재미는 아마도 여기서부터 시작인것같다.

일찍 심어서 너실 너실 우거진 장콩들은 어느새 마디 마다 곧 피울 꽃망울들을 준비해 두고있다.
안 쯤 들어가봤다. '아! 이놈들이' 어디로 뛰어들어왔느지 콩 잎에 입을 댄 흔적들이 보인다. 말뚝을 밖았고 가슴 높이만큼 그물을 쳐 놓았는데. 지금은 다시 손 볼 시간도, 기력도 없다. '느그 뜯어먹고 남은 것, 나 먹자' 그래도 '나' 몫이 더 많겠지?'

마당에 들어설 때 전화가 끊어진다. 대강 씻고 책 펴놓고 막 앉았는데 전화가 온다.
"밭에 갔든가? 빼깽이 과 놨네 내려 오소"
손 위 동서다.

가서 먹고 나서 곧 일어 설 수가 없어 잠시 앉아있는데 "작은 엄마 왔소?  보기가 힘드네요"하면서 조카 애가 가두리서 들어온다.

"치어나 좀 들여놨냐?"
"말도 마이다 아침나절에도 경비정 두 척이 돌아보고 가더니 지금은 백야도 등대밑에다 정박까지 해놓고 있소"
"자연산 농어 '치어' 때문에?"
"작은엄마 그런데 공부는 할만하요?"
"말도마라 어째 과학이  할만하다 싶었는데 3학년 가까워지면서 대강이라도 알아야 하는 원소, 기호, 단위들은 왜 그리 여러 가지고, 또 화합물, 전기, 일률 … 이것들은 기호로만 나오는 문제들이 더러있어서 도무지 캄캄하다."

오붓하게 마주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지나갔다.
'비 오기 전에 선선할 때 밭으로 또 가보자'.

오늘 공부는 그렀게 되고 말았다. 빼앗긴 시간 놓고 후회 하는 건 아니지만 방해 받을 일 없었던, 계속 비만 오던, 그날 들이 생각난다.


#화태도 할머니#고입자격 검정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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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치면서 교육운동에 관심을 가진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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