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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극장가에서는 <다크 나이트>가 화제이다. 그 영화 가운데에서도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뛰어난 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란도, 멋진 슈퍼히어로 배트맨도 아닌, '절대악'이라고 할 만한 조커 역을 맡은 히스 레저이다. 그는 안타깝게도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이 어느 정도였는지 우리는 그저 짐작만 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본의 아니게 악역을 맡아야 할 때가 많았다. 이른바 자칭 진보며 보수며 할 것 없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미친 듯 날뛰었던 2002년 여름, 피버노바가 아동 노동 착취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는 말을 꺼내면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견뎌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반응은 '그래, 너 잘났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세계인의 축제 때는 그냥 축제를 즐기면 그만이지, 누가 시대착오적인 운동권 아니랄까 봐 꼭 그렇게 꼰대 같이 굴어야 해?' 등이었다.

 

지금 대통령이 서울시장일 때, 청계천 재개발 공사를 끝내고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때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나는 청계천은 결코 '복원'된 것이 아니라 반환경적으로 '재개발'된 것일 뿐이라고, 그 재개발 과정에서 엄청난 폭력이 청계천 상인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아갔다고, 재개발된 청계천은 장애인 이동권에 무관심한 차별천이라고 격분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시장의 추진력(?)에 반한 이들은 삭막한 도시 속에 근사한(?) 데이트 코스가 생겼는데, 꼭 그렇게 분위기 파악 못하고 재를 뿌려야 하겠냐며 나를 매사에 부정적인 낡은 좌파로 몰아갔다.  

 

조금이라도 남들과 다른 말을 하면 '통합을 저해하는 분열주의자'로 몰리는 이 땅에서, 다수의 의견과 어긋나는 주장을 하다 보면 '튀고 싶어 안달인 사람',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찬 재수 없는 사람', '현실 감각 없는 이상주의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파탄자', '촌스럽고 까칠한 좌파 도덕론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악역을 맡아야 하겠다. 내가 무슨 마조히스트도 아니고 좋은 소리 들어먹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 이런 말을 하기가 썩 내키지는 않는다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면 기꺼이 악역을 맡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일요일 아침,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일군의 청년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컴퓨터 앞에 모여 앉았다. 뭔가 해서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았더니 어느 포털 사이트 위쪽이 온통 '자랑스러운 대한의 건아 박태환, 수영에서 사상 최초로 금메달 획득 쾌거' 등의 기사로 가득했다.

 

무심히 지나치려는데,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아래쪽의 기사 제목이 눈에 확 띄었다. <그루지야 전쟁..러시아, 총공세에 절정 치달아>. 아, 3일째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구나!

 

집으로 돌아와 황급히 기사를 검색해 보니, 전쟁이 3일째로 접어들며 민간인을 포함해 사상자 수가 2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요즘 주로 이용하는 포털 사이트 '다음'의 톱뉴스가 <세계 경악시킨 박태환, "승부는 남아 있다"> <금메달 박태환 '우상 해켓, 확실히 제쳤다'> <[TV 중계] 남자 핸드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래쪽에는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에 대한 기사가 올라와 있었지만, 톱뉴스가 뒤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더군다나 '다음'은 조중동과 한경, 매경 등이 기사 제공을 중단하며 누리꾼들로부터 청정지역으로 손꼽히고 있는 곳이 아니던가. 

 

다음으로 누리꾼들의 기피 지역으로 떠오른 '네이버'는 어떨지 대충 예상하며 들어가 보았다. 역시 아래쪽에는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에 대한 기사가 올라와 있었지만, <수영 첫 金 박태환, 한국 체육사 불멸의 금자탑 세웠다> <세계를 접수하다> <통쾌했던 '한판승'> <베이징발 金․金…'모처럼 국민 웃었다'> 등이 첫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흔히 진보언론으로 통하는 <프레시안> <경향신문> <한겨레>는 어떤지 들어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세 곳 모두 박태환, 최민호 등 올림픽 소식으로 위쪽을 장식해 놓았다. 특히 <프레시안>은 톱뉴스 제목을 <女핸드볼은 영화 찍고, MB는 코미디 찍고>로 뽑으며 부제목을 <'태극기 거꾸로 든 대통령'에 '국가망신' 비난 봇물>로 붙여 올림픽 소식을 전하면서도 MB 비판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른 땅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태극기가 게양되는 것을 보며 감동하는 사람들에게는, 대통령이 태극기를 거꾸로 들고 있는 것이 화가 치미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만약 대통령이 태극기를 제대로 들고 있었다면, 무엇이 달라지기라도 하는가? 도대체 자본가의 집행위원회에 불과한 국가의 상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그러는 것일까?

 

정작 화가 치밀어야 하는 일은 자본가의 집행위원회에 불과한 국가들이 전쟁을 벌이면서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지금 이런 어마어마한 살육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 소식이 톱뉴스가 되지 못하고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금메달과 올림픽에 쏠려 있다는 것이야말로 더욱 화가 치미는 일이 아닐까?

 

도대체 금메달이 무엇이기에 전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죽음이 외면당해야 하는가? 도대체 올림픽이 무엇이기에 북경의 노동자 민중이 쫓겨나고, 삶의 터전이 철거되고, 환경이 파괴되고, 문화유산이 훼손되어야 하는가?

 

물론 나는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하여 선수와 감독, 코치, 의료 노동자 등 많은 이들이 흘린 땀의 의미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동원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부추겨진 것일지언정, 가뜩이나 웃을 일도 없는 와중에 가슴 졸이면서 경기를 지켜보며 응원하다가 선수들의 금메달 획득에 열광하는 노동자 민중의 소박한 웃음을 애처롭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선수가 획득한 금메달이 아무리 값진 것일지언정, '다른' 국가 사이의 전쟁으로 '다른' 민족이 살육당하는 것을 모른 체할 만큼 값진 것이 될 수는 없다. 도대체 금메달이, 국가가, 민족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사람들의 죽음에 이토록 냉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면서도 우리는 스스로 사람이라 자처할 수 있을까?

 

이미 오래 전부터 정치 선전의 도구였던 올림픽은 이제 자본 선전의 도구로도 활용되고 있다. 탁월한 리얼리즘 감독에서 어용 감독으로 전락한 장이머우가 연출한 올림픽 개막식은 소수민족 통합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정치 선전이었다. 또한 올림픽을 동원한 각종 광고와 판매 전략의 범람은 올림픽이 자본의 축제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정치 선전과 자본 선전에 현혹되어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도, 이미 판매되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도,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장기투쟁 사업장의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노동자 민중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갈 자유무역협정도 모두 잠시나마 잊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가뜩이나 즐겁지도 않은 그 일들을 잠시나마 잊으려 하는 동안에도, 머잖아 우리의 목을 죄어 올 그 일들은 우리의 시선을 돌려놓은 채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레디앙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금메달#올림픽#러시아#그루지야#다크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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