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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이 다 비친다고 해서 그 깊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알 수 없으므로 지금 이 순간 평화롭다." 책 <안식월>에 실린 사진.
"속이 다 비친다고 해서 그 깊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알 수 없으므로 지금 이 순간 평화롭다." 책 <안식월>에 실린 사진. ⓒ 박병혁

"브레이크를 밟아야만 했다. 삶이 너무 많이 뒤틀려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훌쩍 떠났다."

'일상 탈출'을 결행한 시인 김수영(41)이 부럽다. 그녀는 인생의 절반이라 할 수 있는 불혹에 들어섰다. 선인들은 '유혹에 흔들리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녀는 '일상 탈출'이라는 유혹을 물리치지 않았다.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다. 그런 그녀의 용기가 부럽다.

김수영은 <안식월>(황소자리 간)에 탈출기록을 담아냈다. 신춘문예도 당선하고 시집 두 권을 냈으며,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대필업자'였던 그녀.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최고의 권력자와 유명 연예인의 에세이, 건강서, 교육서 등을 대필해 왔다. 노트북을 안경처럼 늘 끼고 살 정도로 프리랜서의 일감도 많았는데, 모두 무시해 버렸다.

뱀눈으로 째려보는 남편과 두 아이를 남겨두고서 그녀는 떠났다. 주부가 가족을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문화방송 주말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극중 한자(김혜자)는 '1년 휴가'를 관철시켰는데, 주부 김수영은 '1개월 휴가'를 보낸 것이다.

"내 인생이 산만하고 지루한 것은 그런 치열함이 모자라서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 상황에서 나는 늘 습관에 굴복했다. 끊임없이 인터뷰를 하거나 취재해서 원고를 써댔다. 일감이 없으면 불안해서 동시에 몇 개씩 일을 했다. 내 얼굴은 고단함으로 찌들었고 늘 건조한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김수영이 일상 탈출지로 찾아간 곳을 보니 또 부럽다. 필리핀 '뚜게가라오'와 '라굼'이다. 지구촌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오지. 그곳에서 청춘을 바친 선교사를 찾아 갔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정글에서 그녀는 한 달을 보냈다. 꿈같은 '안식월'을 전화도 인터넷도 없는 밀림에서 보낸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비행기에 몸을 실은 뒤였다. 혼자 달랑 짐을 싸서 올랐던 비행기는 그를 뚜게가라오 상공까지 무사히 실어다주었다. 소읍의 시외버스 터미널 같은 공항. 잡초 속에서 활주로가 나타났고, 랜딩기어가 내려갔다. 마침내 탈출한 것이다."

그 곳의 엄마는?

 <안식월> 책 표지.
<안식월> 책 표지. ⓒ 윤성효
밀림에서 그녀는 무엇을 느꼈을까? 그녀는 그곳 교회에서 한 엄마를 보고서 '큰 빚을 진 듯했다'고 한다. "그동안 얼마나 삶에 대해 엄살을 떨었는가!"라고 반성했다고 한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그곳의 엄마는 이랬다.

"그날 나는 세 아이의 엄마를 만났다. … 엄마는 아이를 안은 채 기도를 드리면서 울고 있었다. 왠지 코끝이 시큰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코를 풀다가 아이 엄마의 발을 발견했다. 넓은 발바닥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발가락 사이에 끼인 슬리퍼는 흙먼지 투성이였다."

저자는 "그녀의 가난에 숨이 막혀왔다"면서 "누구나 어느 정도의 숨막힘은 가지고 산다. 차이라면 그 숨막힘을 어떻게 견디느냐이다. 누구나 우울하고 누구나 먹고 살기 어렵고 누구나 시간이 없고 누구나 살면서 억울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고 느꼈다.

그래도 그곳 사람들은 늘 웃는다. 저자는 "도대체 이 사람들은 왜 이리 웃음이 헤픈가"라고 할 정도다.

"웃는 사람들은 처녀든 총각이든 아름답다. 웃음이 헤픈 건 순전히 영혼이 맑고 연해서다. 웃는 그들은 사람을 흘릴 정도로 아름답다. 적어도 나를 흘릴 정도로! … 보통 가난하게 살면 시름만 는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시름이 많아도 잘도 웃는다. 한 사람이 웃으면 금세 따라 웃는다."

김수영은 라굼 마닐라대학 교수의 친정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전기나 가스가 들어오지 않으므로 가전제품이 소용없었고 가구도, 그릇도 없는 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수영은 거기서 얻은 게 많다.

"집주인은 일주일 동안 마닐라에 가고 없었다. 거리낌 없이 집을 비워주는 주인이 대단하다고 말하자, 주인이 없는 사이 집을 지켜주니 얼마나 고맙냐는 것이 선교사님의 조크였다. 실제 라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자가 들려준 그 곳의 돼지 이야기도 재미있다.

"선교사님은 예쁜 새끼돼지 두 마리를 골라 값을 치렀다. 돼지 주인은 새끼 돼지 값을 받고 돼지를 키워준다. 이곳 사람들의 산수는 재미있다. 선교사님은 몇 달 뒤에 커다란 돼지를 사가는 셈이지만, 돼지 주인은 새끼 돼지 값만 받는다. 이런 산수가 가능한 건 돼지에 들이는 수고가 없기 때문이다. 돼지는 스스로 뛰어다니며 먹이를 구해 먹는다. 떨어진 과일을 먹거나 벌레도 잡아먹는다."

세계 오지의 풍성함?, 빌딩 숲 속의 풍성함?

어느새 그녀도 밀림의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 같다. 예배당의 새벽 기도 이야기를 들어보자.

"영어로 하는 설교를 알아들을 리 없고, 찬송도 아는 멜로디가 없고, 심지어 기도조차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게 놀라웠다. … '기도합시다.' 선교사님의 이 한 마디에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마치 누가 더 많이 울까 경쟁하는 것처럼 …. 그런데 그들처럼 내가 울게 될 줄이야. 눈물은 치유의 증거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돌보지 않은 상처, 드러내지 않은 상처, 심지어 자신도 몰랐던 상처가 있다는 뜻이다. '내 상처는 무엇인가?'"

그녀는 세계의 오지에서 풍성함을 느꼈다. 그 풍성함은 빌딩 숲 속에도 있다고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내가 경험한 열대는 떠나와서 보면 한없이 가난하고 초라한 곳이다. 그러나 발견하면 할수록 한없이 풍성한 삶을 내어주는 곳. 그 풍성함이 단지 라굼이라는 적도 근처의 한 지역에만 있지는 않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어느 곳에 있든 나는 자유롭고 존중받아야 한다. 스테이크를 뒤집든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든."

신현림 시인은 김수영의 일상탈출 기록에 대해, "생존의 속도를 늦추고 인생을 바꿔가는 그만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삶을 변화시킬 에너지가 되고, 치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 책에는 김수영이 겪은 열대 오지가 사진으로 담겨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박병혁이 열대의 거침없는 풍경과 어울려 생생하고 감동적인 모습을 담아 놓았다. 경상대를 나온 김수영은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시집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과 <오랜 밤 이야기>(창비 간)를 펴냈다.



안식월 - 열대 오지에서 보낸 한 달

김수영 지음, 박병혁 사진, 황소자리(2008)


#김수영#안식월#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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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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