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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라기 공원>이야기를 오랜만에 해야겠다. 그러나 정부가 한때 지겹게 되풀이했던 '스필버그와 자동차 몇 대' 이야기는 아니다(요즘엔 이 '동화'가 오히려 한국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망쳐 버렸다고 원망하는 목소리까지 들린다).

 

영화 속에 '말콤'이라는 수학자(겉모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한 '수학자'는 전혀 아니지만)가 나오는데, 그의 역할은 쉽게 말해 '딴지 걸기'다. 완벽하게 되살아난 공원을 보고 어린아이들은 물론 고생물학자인 그랜트와 엘리까지 순진하게 감탄하니 어깨가 으쓱해진 해먼드 회장. 그런데 그때마다 말콤이 '딴지'를 건다.

 

"자연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건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로 요약할 수 있는, 분명하고 단순한 '자연보호' 논리다. 영화는 이 '단순한' 논리가 옳았다는 결론을 내리지만, 역시 수학자가 말하기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문제는 마이클 크라이튼이 쓴 원작 소설에서는 말콤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말콤의 두뇌는 더 진가를 발휘한다. '프랙탈 곡선'이니 '혼돈 이론'이니 하는 어려운 수학과 과학 이론을 끌어들이는데, 결론은 이렇다.

 

"당신(해먼드 회장)은 이 공원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연에는 결코 통제할 수 없는 부분, 불확실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 부분은 갈수록 늘어난다. 당신은 결국 이 공원과 공룡을 통제할 수 없다."

 

생각해 보자, 크라이튼 소설과 스필버그 영화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영화에서 말콤은 해먼드 회장에게 분명히 '반대'한다. 고래잡이 배에 몸 묶고 시위하는 그린피스 대원의 '반대'다.

 

그러나 소설에서 말콤은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해먼드의 계획을 '의심'하고 있으며, '불안'을 품고 있다. 정말로 해먼드의 기술이 공원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그도 반대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콤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불안 요소를 제거할 수 없는데도 해먼드 회장은 위험한 자신에 차 있다. 말콤이 공룡들을 보면서 마냥 감탄만 할 수 없는 건 이 때문이다.

 

'불안', '의심', 제거할 수 없는 '위험 요소'. 이제 왜 <쥬라기 공원> 이야기를 뜬금없이 꺼냈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중국 사람들 안전까지 걱정해 주시는 대통령께선 아직도 광우병과 쇠고기 협상, 촛불 시위와 저항 문제를 잘못 보고 있다.

 

시민들이 그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처럼 엄청나게 많은 사람, 이전에는 다른 사안으로 서로 충돌했던 사람들이 모여 촛불을 쳐드는 일은 일어나기 어렵다.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한 건 '반대'가 아니라 '불안'이다.

 

몇몇 저렴한 양심을 가진 학자들께서 상황을 일그러뜨리려 애쓰신다만, 소설 속 말콤 같은 지식이 없어도 시민들은 직감으로, 상황의 핵심에 다가서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결코 '위험'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완벽한 통제'니 '너무나 적은 확률'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인간 존중 문제뿐 아니라 과학의 눈으로 봐도 너무 위험하고 오만하다. 광우병보다 더 위험한 건 바로 그들의 태도다.

 

'불안'은 언제나 '비과학'은 아니다. 불안은 떄로는 인간이 파국으로 치닫는 걸 막는 '안전장치'가 된다. 오히려 독선에 빠진 '과학' '기술'이나 몇몇 통계만이 전부라고 여기는 '과학', 목적 달성을 위해 자료를 일그러트리는 '과학'이야말로 상황을 혼돈으로 몰어넣을 수 있는 요소다.


#쥬라기공원#광우병#촛불집회#미국산쇠고기#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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