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남한산성 성벽길
남한산성 성벽길 ⓒ 유혜준

한 끼의 밥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남한산성 길을 걷다가 우연히 들른 장경사에서 맛있는 밥을 먹었습니다. 지나는 길손인데도 점심 공양을 했느냐고 묻고, 끼니를 챙겨주는 마음이 어찌나 고맙던지, 감동했습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조금씩 젖어가던 참에 따뜻한 방에서 깊은 맛이 우러난 아욱국과 소박한 찬으로 맛난 점심을 먹었지요. 달디 단 수박까지 후식으로 먹었습니다.

13일, 남한산성 길을 걸었습니다. 걷는 동안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비는 가늘게 뿌리기도 하고, 부슬부슬 내리기도 하고, 빗발이 굵어지기도 했지요. 다른 사람들은 비옷를 준비했지만 저는 미처 준비하지 못해 우산을 빌려 쓰고 다녔습니다. 이 날도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인도행)' 회원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도보여행 출발지는 지하철 8호선 산성역입니다. 지하철 덕분에 교통이 참 편리해졌습니다. 2번 출구로 나가 조금만 걸어가면 버스정류장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9번 버스를 타고 십분 남짓 가다가 남한산성유원지에서 내리면 됩니다.

지하철 산성역 8번 출구에서 도보여행 출발~

 남한산성 탑공원
남한산성 탑공원 ⓒ 유혜준


자, 이제부터 남한산성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남한산성 길이 걷기 좋은 곳도 많지만 중간에 걷기 힘든 곳도 몇 군데 있습니다. 운동화보다는 등산화가 더 적당합니다.

날씨가 선선합니다. 출발할 때만 해도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조금 세차게 붑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아 걷기에 적당하지만 그래도 걷다보면 땀이 흐릅니다. 잠시 쉬려고 서면 땀이 식어 선뜩한 한기가 느껴지지요.

조금 걸어 올라가니 탑공원이 나옵니다. 여러 가지 모양과 크기의 돌들이 한 줄로 쌓여 탑이 되었습니다. 이런 탑들이 어찌나 많은지 탑들이 정기모임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렇게 탑을 쌓을 때는 마음을 담는다지요.

중원약수터로 가는 길이 나옵니다. 예전에는 약수터가 있으면 꼭 들르곤 했는데 요즘은 그냥 지나칩니다. 걷기 전에 미리 물을 챙겨 넣기 때문이지요.

오르막길이 시작됩니다. 오르막길은 아무리 올라가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힘이 든다고 해야 하나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래도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저절로 나옵니다. 나중에는 '헥헥'거리게 되지요. 바람소리 속에 빗소리가 섞여 듭니다. 아, 비가 내리네요. 그냥 맞으면서 걸으려고 했지만 빗줄기가 굵어지는 걸 보니 안 되겠네요.

함께 걷는 일행은 배낭에서 비옷을 주섬주섬 꺼냅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저는 우산을 빌립니다. 걷다보면 우산이 거치적거리겠지만 그래도 있는 게 훨씬 낫지요. 그래서 걸으면서 우산을 폈다가 접었다가를 반복했답니다.

콘크리트 길을 오르고, 나무 길을 오르다보니 멀리 성문이 보입니다. 남문인 지화문(至和門)입니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니 돌계단이 나옵니다. 비옷을 입은 일행을 멀리서 보니 순례자들 같습니다. 하긴 남한산성 도보순례를 떠나는 길이니 순례자라고 해야겠지요.

비 내리는 남한산성 성벽길을 우산 쓰고 걸었네

 남한산성 남문
남한산성 남문 ⓒ 유혜준


남한산성은 초록이 한창입니다. 이끼가 잔뜩 낀 커다란 느티나무 옆으로 숲이 우거졌습니다. 이맘때 나뭇잎 빛깔이 가장 아름답지요. 여름이 깊어지면 더불어 나뭇잎 색도 진해집니다. 연초록빛이 진초록빛으로 변하는 거지요. 

성벽길을 따라 천천히 걷습니다. 시인 한하운은 '가도 가도 황톳길'이라고 읊었으나, 이곳은 '가도 가도 성벽길'이네요. 남한산성, 하면 병자호란이 자꾸 떠오릅니다. 남한산성에는 치욕의 역사가 숨어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지금의 성벽길에는 그런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저 걷기 좋은 길이 되어 펼쳐져 있을 뿐이지요.

동문 가는 길로 접어듭니다. 빗줄기는 굵어지다가 가늘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내립니다. 성벽길 산책이 아니라 빗길 산책입니다. 이상하게 내리는 비가 조금도 귀찮지 않습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뭇잎에 매달렸던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도 함께 들립니다. 성벽 사이로 다람쥐가 쪼르르 지나갑니다.

동문 앞에 다다랐습니다. 12시 40분. 1시간 삼십분쯤 걸었네요. 아치형 성문 밑을 지납니다. 성벽을 따라 다시 오르막길이 펼쳐집니다. 시선을 들어 길 끝을 봅니다. 길이 끝난 듯 보이지만 그곳에 다다르면 길은 다시 이어지겠지요.

오르막길을 오르니 고른 흙길이 보입니다. 성벽을 따라 낙엽이 쌓여 있습니다. 밟으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았는데 막상 밟으니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비에 젖은 탓이지요.

 소박한 밥상입니다.
소박한 밥상입니다. ⓒ 유혜준


'남한산성 장경사'라고 써있는 문이 나옵니다. 퍼런 비닐이 지붕을 덮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니 마치 비 맞을까봐 덮어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때문은 아니겠지요. 지붕이야 비를 막으라고 있는 것이니까요.

절 마당으로 들어가니 한 쪽에서 연등 철거작업이 한창입니다. 색색의 고운 연등들이 비를 맞은 채 부려져 있네요. 전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라 걸렸던 연등이지요. 더 걸어둬도 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하루 등'이기 때문에 내리는 것이라네요. 연등도 하루 등이 있고 6개월 등이 있고, 1년 등이 있다고 합니다.

이날 들른 장경사는 아주 오래 기억에 남는 절이 되었습니다. 청하지 않은 점심밥을 얻어  먹었거든요. 밥 한 그릇이 별 거 아닌 듯해도 참으로 의미가 깊더군요. 점심시간이 지났음에도 낯선 길손의 끼니를 챙겨주는 따뜻한 마음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아욱국은 깊은 맛이 우러났고, 소박한 반찬은 아주 맛깔스러웠습니다. 정말 맛있다, 감탄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밥 얻어먹은 값을 하느라 괜히 해보는 말이 아닙니다.

장경사의 따뜻한 점심 인심에 감동하다

 벌봉에 올라서면 멀리까지 보인답니다.
벌봉에 올라서면 멀리까지 보인답니다. ⓒ 유혜준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성벽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벌봉 가는 길이 나옵니다. 남한산성 군포지도 지납니다. 군포는 성을 지키는 초소건물입니다. 초소는 사라지고 돌무더기만 남은 것을 보니 저절로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이 곳은 흔적이라도 남아 있네요. 흔적 없이 사라진 것들이 하나 둘이던가요. 

벌봉의 유래를 설명한 표지석이 보입니다. 벌 모양의 바위라 해서 벌봉이라 불렸답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이 봉우리에서 남한산성 성내를 관찰했다고 합니다. 아픈 전설이 스민 곳이지요. 벌봉은 전체가 바위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리 높지는 않으나 올라가려니 내려올 일이 까마득해 안 올라가고 밑에서 구경만 했습니다. 제가 아닌 척 해도 은근히 겁이 많거든요.

나뭇잎이 무성한 활엽수림을 지나니 소나무 숲이 나옵니다. 오래 묵은 소나무들이 은은한 향기를 내뿜습니다. 소나무 숲 앞에 둥근 나무를 자른 토막이 여섯 개 놓여 있습니다. 지나는 길손이 쉬어가면 딱 좋을 것 같습니다.

그 곳을 지나 조금 걷다가 쉼터를 만나 쉬었습니다. 간식거리로 싸온 떡과 따끈한 감잎차를 나눠 마셨지요. 바람이 제법 심하게 불어 걸을 때는 몰랐는데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조금씩 추워집니다. 추위를 몰아내려면 다시 걸어야겠지요.

 소나무 숲에서 솔향기가 납니다.
소나무 숲에서 솔향기가 납니다. ⓒ 유혜준


성벽길과 소나무 숲 사이의 길을 따라 걷고 또 걷습니다. 걷기만 하는 게 지루할 만도 하건만 조금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비가 내리다가 그치기를 반복하기에 저도 우산을 폈다가 접었다를 반복하면서 걸었습니다. 햇빛이 나는 것 같아 하늘을 보면 빗방울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집니다.

북문 쪽으로 내려가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 길은 내려가는 길인데도 상당히 험합니다. 비탈길이라서 그렇습니다. 비 덕분에 바위가 촉촉하게 젖어 자칫하면 미끄러질 것 같아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평소보다 더 긴장하면서 걷습니다.

한 시간쯤 그런 길을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니 하남시입니다. 성남시에서 올라가 하남시로 내려 온 것이지요. 먼 길을 돌아 왔네요. 11시에 시작한 도보여행이 끝난 시간은 오후 4시 10분. 걸은 거리는 12km정도입니다.

남한산성 길, 걷고 싶다면 지금이 아주 좋은 때입니다. 물론 걷기에 좋은 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숲이 한껏 살아나고 있을 때 걷는다면 걷는 기쁨은 배가 되고도 남겠지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걸어도 좋고, 역사의 아픈 상흔을 되새기면서 걸어도 좋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걸은 길] 남한산성 남문 -> 동문 -> 벌봉 -> 북문
[걸은 거리] 12km



#도보여행#남한산성#벌봉#장경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