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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5월이 호수에 잠겨있다.

요즘 북한강 상류는 오동 꽃 세상이다. 새파란 호수를 따라 구불구불한 구비 길을 돌아 나오려니 강물 위로 오동나무들이 그림처럼 잠겨 있다. 오동 꽃은 보랏빛이다가 이내 잔잔한 비색(翡色)으로 변한다. 오월 하늘, 춘천호의 쪽빛 강물과 오동 꽃이 함께 어울려 온 몸에 파란 물이 들듯하다.

 푸른 5월이 쪽빛강물에 잠겨 있다
푸른 5월이 쪽빛강물에 잠겨 있다 ⓒ 윤희경

아버님은 아들을 낳은 기념으로 소나무를, 여동생을 본 다음엔 오동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나무들마다 '소나무는 아들나무, 오동나무 딸 나무'라며 이름을 하나씩 달아 놓았다. 요새 말로 기념식수이겠으나 아버님의 마음은 달랐다.

나무를 심은 그날부터 잘 자라 듬직한 성목(成木)이 되도록 정성으로 키워냈다. 아들이 장성하여 며느릴 맞이하면 소나무를 대들보 삼아 살림집을 지어주고, 오동나무론 장롱을 만들어 시집 밑천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역마살이 잡혔는지 나무들이 크기도 전에 고향을 떠나 떠돌이가 되었다.

 봉황이 머물다간 자리
봉황이 머물다간 자리 ⓒ 윤희경

어머니는 시간만 나면 쑥쑥 자라나는 오동나무를 보며 태몽 꿈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어느 보름날 밤 밖에서 일을 보는 데 오줌발이 얼마나 힘이 좋던지 다른 날보다 넓고 따뜻하게 퍼지더라는 것이다. 그때 갑자기 오색 창연한 무지개가 오동나무에 걸려있는 것을 치마폭으로 담아내 어린 생명을 얻었다 했다.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냐며 큰 인물 될 것이니 몸을 조신해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애틋하고 따사로운 어버이의 정이 이보다 더할까 싶게 가슴 훈훈해온다. 그래서일까, 봄마다 오동 꽃 피어나면 까마득한 봉황의 전설을 생각해 내곤 긴 목을 빼 먼데 하늘을 올려다본다. 행여 봉황의 날갯짓 같은 상서로운 빛이 오동나무의 걸리는 날이 언젠간 도래할 것을 은근히 기다리며….

봉황(鳳凰)의 봉은 수컷을, 황은 암컷을 상징 한다. 암수가 한 쌍으로 만나면 그날부터 오동나무 가지에 둥지를 틀고 신방꾸미기를 시작한다. 넉넉한 오동잎에 맺힌 아침 이슬을 마시고 대나무 열매를 따 먹으며 평생 동안 파란 마음을 키워간다. 금슬이 뛰어나 부부 싸움이 있을 수 없고, 짝 중에 하나가 세상을 하직하면 따라 죽는단다. 수만리 창공을 날아올라 어깨 죽지가 저려 와도 아무 나무에나 덥석 앉는 법 없고 오동나무래야 자리를 함께 한다 했다.

 오동꽃 피어나 작은 종처럼 수없이 매달려 바람이 일 때마다 달랑거리고 있다.
오동꽃 피어나 작은 종처럼 수없이 매달려 바람이 일 때마다 달랑거리고 있다. ⓒ 윤희경

손아래 누이는 어쩐 일인지 결혼생활이 평탄치 못했다. 언젠가 시골집을 훌쩍 다녀간 후 소식이 없다. 생전에 딸이 보고 싶다며 동구 밖을 내려다보던 늙은 어머니의 흐린 눈매엔 늘 눈물이 글썽했다. '몹쓸 것' 하고 푸념을 하며 쪽대문을 열어놓고 딸을 기다리던 어머니도 가신 지 꽤 오래 되었다.

북한강 가에 오동 꽃이 피어날 때마다 보기가 좋다던 나무들의 살결이 오늘따라 더욱 뽀얗다. 넉넉한 오동잎 사이로 바람 한 자락 일어 강 마루를 스산하게 스쳐간다. 봉황이 온다던 전설을 비웃기나 하듯, 해마다 오동 꽃은 비색으로 피어나 버거운 세월에 몸살을 앓고 먹구름 한 장 헤살 궂게 오동잎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다.

 내 어머닌, 오동잎과 오동나무 열매 갈리는 소리를 참 좋아했다.
내 어머닌, 오동잎과 오동나무 열매 갈리는 소리를 참 좋아했다. ⓒ 윤희경

오동 꽃이 함빡 피어난 요즘, 어머니가 태몽에 보았다던 그 옛날의 쌍무지개 대신, 달빛 한 자락 오동나무에 걸려있다. 어머니가 그립다. 뭐니 뭐니 해도 맏이가 제일이라며 서울 살림을 접고 시골로 내려와 말년을 함께했으나, 난 어머니처럼 넉넉한 오동잎이 되질 못했다. 오동잎 지던 어느 가을날, 잎 지는 소리가 좋다며 마른 잎 속으로 몸을 숨겼다.

봉황새 날아와 금방이라도 둥지를 틀면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저 아래 동구 밖으로 귀한 손님이 찾아올 것만 같아 자꾸만 들머리 쪽을 내려다본다. 오늘 저녁엔 꿈속에서나마 봉황새 만나 벽오동 잎에 쌍무지개가 걸린 뜻이 무어냐 물어 볼 참이다.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과 농촌공사 전원생활, 북집 네오넷 코리어, 정보화 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를 찾아오시면,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오동꽃#오동나무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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