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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넘기고 아내의 뜨락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비파나무와 꽃치자가 얼어 죽은 사실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 그뿐 아니라 돈나무도 동해를 크게 입어 잎이 마르고, 동백도 가뭄에 시달린 듯 비실거리고 있었다. 대부분 상록활엽식물들이었다.

식물의 성장에 기후와 토질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나 도시와 산골의 온도차가 크다는 점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석류나무는 지주를 세우고 비닐로 감아두기까지 했는데, 광주에서 옮겨간 나무라는 생각만으로 비파나무와 치자나무를 믿은 내가 문제였다.

아내의 뜨락은 광주도심과 직선으로 10km 정도 밖에 안 되는 곳이다. 그러나 뜨락은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이다. 나중에 마을 분들에게 들으니 한겨울 날씨가 광주보다 2-3°C 낮다는 말이었다.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으나 뒤늦게 알아낸 중요한 사실이었다.

비파나무와 치자나무 마른 가지를 자르고 물을 주었지만 소생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비파나무 숲을 만들겠다는 꿈은 보류할 수밖에 없겠다.

사실 모든 땅에 모든 나무들이 자라는 건 아니다. 따뜻한 기후에는 잎이 넓은 식물들이 자라고, 북으로 갈수록 침엽수종이 우세하다는 사실은 초등학생이면 아는 일이다. 그런데 미세한 기온차이나 토양의 성질에 대한 고려 없이 광주에서 사는 식물인데 뜨락에서 못 살랴 하는 판단으로 나무를 심고 월동대책을 세우지 않았으니 누구 탓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특별한 조언 없이 혼자 뜨락을 가꾸다보니 시행착오가 발생하고 예상 못한 손실이나 희생도 나오는가 보다. 죽은 나무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라는 생각을 하며 지난 봄 내내 뜨락에 잘 자라는 나무들을 찾았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철쭉이었다. 추위에 강하면서도 울타리용으로도 적합하고 꽃도 좋다는 점 때문에 우선 골랐다. 그리고 동쪽 산자락에는 ‘베니’와 ‘대왕’이라는 품종을 골라 심고 서쪽에는 하얀 철쭉으로 심어 꽃길을 내었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중앙에는 좀 더 자란 ‘대왕’을 두 줄로 심었더니 잔디밭과 농사 지을 텃밭이 구분되면서 뜨락의 가운데서 혼자 쓸쓸했던 자두나무도 외롭지 않게 되었다.   

뜨락의 남쪽에서 본 꽃길 지난 일요일 길에 심은 잔디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왼쪽 멀칭한 밭에 야콘을 심을 작정이다.
▲ 뜨락의 남쪽에서 본 꽃길 지난 일요일 길에 심은 잔디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왼쪽 멀칭한 밭에 야콘을 심을 작정이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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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이 만들어지니 지난해 여름, 땀 흘려 놓았던 징검다리는 소용없이 되어 아깝지만 결국 걷어내고 말았다. 걷어낸 돌은 허전한 곳에 낮은 돌담을 쌓을 작정으로 모아두었다.

경험은 중요한 지식이다. 요즘 나는 많은 새로운 경험을 쌓는 중이다. 그간의 지식도 버릴 수 없지만 지금의 경험은 앞으로 생존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실수 없이, 시행착오 없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세상살이가 다 그러하던가! 당분간은 배우는 자세로 살아야할 것 같다.

봄의 시작과 함께 주말이면 아내와 나는 꽃길을 만들고, 나무를 심고 앞으로 야콘, 옥수수, 고구마 심을 곳에 멀칭 비닐 덮는 일을 했다. 뜨락에는 아직 집이 없기에 광주에서 오가며 하는 일이라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 대강 뜨락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봐진다. 동편으로 자두나무, 남으로 뽕나무, 서편으로 사과나무와 감나무를 주제로 숲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 사이에 난 꽃길을 따라 뜨락을 천천히 걸으면서 꽃을 감상하고 열매를 거둘 날은 상상하며 피로를 잊었다.

입구에서 바라본 꽃길  자두나무 와 어우러져 에스라인을 자랑한다. 하얀 땅에도 여름이면 잔디가 푸르를 것이다.
▲ 입구에서 바라본 꽃길 자두나무 와 어우러져 에스라인을 자랑한다. 하얀 땅에도 여름이면 잔디가 푸르를 것이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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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퇴근 후, 일요일에 못다 심은 잔디를 심고 있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뜨락에 갔더니 꽃 피는 소리가 가득했다. 아직은 엉성한 꽃길이지만 뜨락을 감고 도는 에스라인(?)이 더욱 선명했다. 꽃길 따라 몇 바퀴 돌았지만 늘 보자고 만든 뜨락을 두고 광주로 향하는 마음이 아쉽기만 했다. 아내는 임시 거처할 수 있는 관리사라도 우선 짓자고 한다.

오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만들어놓은 밭에 야콘을 심을 계획이다. 금년에는 300주를 심어 일정한 수익을 올리겠다고 야문 꿈을 꾸는 아내를 본다. 다행하게도 아내는 지금껏 해보지 않은 힘든 노동을 하면도 아주 서서히 건강을 회복하는 중이다. 흙을 밞고 꽃과 소통하면서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소쩍새의 울음을 쫓다가 솔 향에 감동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뜨락 만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다시 한다.

이 봄에는 아직 이름이 없는 뜨락에 이름을 붙이는 일도 급하지만 아내의 병이 완전히 나았으면 좋겠다. 매실과 자두를 딸 무렵에는 아내도 병을 훌훌 털어낼 수 있을 것도 같다. 매화 진 자리에 팥알보다 작은 열매가 반갑다.

덧붙이는 글 | 한겨레 홍광석 블로그에도 게재할 것임



#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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