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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응아'를 했더니, 토끼가 나왔다".

 

<이나중 탁구부>를 그린 '후루야 미노루'의 단편 <얼토당토>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개연성이라는 말은 우주 저쪽으로 날려버린 듯한 뻔뻔한 전개에 순간 아찔해진다. 그런데 이 문장, 웬지 친근한 이유는 뭘까? 아마도 이 소설 때문이리라.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카프카, <변신>)

 

말도 안 되는 사건을 일상 속에 버젓이 끼어넣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닮았다. 우리가 당혹해하는 건 항문에서 토끼가 나오고 사람이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근원을 알 수 없기에, 어떤 대처도 할 수 없기에 당혹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어차피 삶의 한 부분만 떼어낸 조각 그림일 뿐이다. 어차피 창작의 세계, 이유를 붙인다면 얼마든지 붙일 수도 있다. 토끼를 '눈' 소년은 우리가 아직 모르는 오염 물질에 노출되었고, 그의 뱃 속에서 신비한 화학 작용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그레고르는 극소수 사람만 걸리는 희귀 유전병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마이클 클라이튼이나 로빈 쿡처럼 설명할 재량이 안된다면 그냥 오컬트 취향으로 나가서 악령, 바알제붑, 홍콩 할매를 갖다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카프카와 후루야는 이유를 설명하길 거부한다. 그들은 신비주의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중세나 근대인이 아니라 현대인이다.

 

현대인은 이미 '이유'를 설명할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수소폭탄 실험장 근처에 있었다가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던 어부들, 우연히 테러 현장에 있다 죽는 소년, 과학 기술은 미쳐 날뛰는 황소이고, 누구라도 거기에 치이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유라도 설명할 수 있다면 차라리 나으리라.

 

꼭 초자연 현상이 아니어도 그렇다. 공장에서 잘만 일하던 노동자가 어느날 불치병에 걸린다. 공장 공기에 뭔가 안 좋은 게 있는 것 같은데, 회사는 묵묵부답이고 경찰은 '구체적 증거' 타령만 한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사회 자체가 한 인간에겐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 된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어느날 자기 몸이 딱딱한 껍질로 덮여 있거나 끈적거리는 아메바로 변한다 하더라도,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고 누구에게 보상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설령 운좋게 진실을 알아낸다 하더라도 되돌아갈 방도는 거의 없다. 나이든 농민이 시위 현장에서 누군가에게 맞아 죽어도, 그 범인이 경찰이란 걸 밝혀내더라도, 상대가 사과 안 하고 버텨버리면 그만이다. 존 그리샴 소설처럼 정의로운 변호사가 약자를 구원하는 이야기는 재미야 있겠지만, 현실에서 이루어지리라 믿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이제 진실을 알지도 못하거니와,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상처만 받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아직 사람들이 '소외'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던 시대의 시민 그레고르 잠자는 최소한 슬픔과 고통을 표현할 줄 안다. 후루야 미노루가 그린 21세기의 명랑 소년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인생이 더욱 더 큰 부조리로 빠져들고 있는데도, 아무에게도 고통을 호소할 수 없는 상태여도 그저 유쾌하다.

 

<얼토당토>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년은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라고 외치며 미친듯이 웃어댄다. 철학자들은 지금도 인간의 왜소화를 이야기할 때면 한없이 심각해지지만, 대중은 이미 왜소한 자기 모습에 익숙해진 것이다. 웹툰 <마음의 소리>가 갈파한 '포기하면... 편하다'가 우리의 철학이 되었다. 비록 그 밑바닥에 깔린 게 더욱 깊은 절망, 비관일지라도 말이다.

첨부파일
DIE VERWANDLUNG.jpg

#카프카#후루야 미노루#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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