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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타계한 이형기 시인의 시 중에 '낙화(落花)'라는 시가 있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사람의 진퇴(進退)에 대한 아름다움과 추함을 생각하곤 한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렇게 시작되는 이 시는 욕심으로 자리를 고집하는 자기중심의 현대인을 예술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현직 국회부의장이란 감투를 쓰고 있는 노 정치인이 총선 공천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몸담고 있는 당을 뛰쳐나와 다른 당으로 옮긴 사실은 정치 발전을 바라고 있는 국민들을 실망하게 한다. 정치 발전은 많은 뜻을 함의하고 있다. 제도뿐만 아니라 정치인의 수준 향상도 정치 발전에 속할 것이며, 국민의 의식 향상도 그 속에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세대교체가 정치 발전에서 차지하는 몫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용희 국회부의장의 최근 행보는 노욕(老慾)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나도 한 때 그의 지역구 주민으로 그를 지지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의 인생 역정에 찬사를 보냈던 적도 있다.

 

국민을 위해서라면 고생도 두려워하지 않은 그 배포, 죽음의 고비를 넘나던 한 정치인과 끝까지 함께 한 그 불굴의 의지, 정의를 위해서라면 형극의 야당 길도 마다하지 않은 그 대쪽같은 정의감, 그리고 한 번 만난 사람의 이름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그 총기(聰氣). 이런 것들이 그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자유선진당 행은 그가 지금까지 쌓은 탑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결과밖에 안 된다. 사람은 현실보다 명분이 중요할 때가 많다. 이것은 사회적 위상이 높은 자리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는 장기 군사 정권 하에서도 명분을 좇아 어려운 야당 생활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정치에 지역 바람이 휘몰아칠 때도 당당히 버텨냈었다. 지연(地緣)에 가두어진 정치가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정치 인생 막바지에 여당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행세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보상의 일단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나는 '이용희'란 사람에게서 '진보 정치인'을 그려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극 보수 정치인'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진보와 보수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은 우리의 지난 정치 지형으로 볼 때, 정치 변혁을 열망하는 야당을 진보와 혼동하던 시절을 돌이켜 볼 때, 이용희는 분명 변화를 희구하며 보수를 비판하던 입장에 서 있었다. 신민당이 그랬으며 평민당이 그렇고 새천년민주당 그리고 열린우리당이 바로 그의 정치철학을 담아낸 것이다.

 

그런 그가 정치를 마감할 시점에 이르러 극 보수를 전면에 내건 '선진당'으로 적(籍)을 옮기면서 "6·25 참전 용사 출신으로 개인적으론 극우, 진짜 보수"라고 일갈했다는 보도는 세상을 우울하게 만든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용희의 이런 발언이 "이용희는 없다"라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져 안타깝다. 6·25참전 용사는 다 극우여야 하는가! 그의 정치 역정을 무시한 노욕에서 비롯된 감정적 발언이 그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보는가!

 

지난 단체장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전국을 휩쓴 가운데서도 그의 지역구에선 열린우리당 후보가 모두 당선됐다. 또 총선에서 특정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참패했지만, 그의 지역구에서는 열린우리당 후보가 선전했다. 그 때 그를 조직의 귀재라고까지 치켜세운 보도도 있었다.

 

그는 누가 뭐라든 지역구를 잘 관리하는 정치인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욕심을 부추기는 결과로 작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 발전은 자기가 잘 관리한 지역구를 후배들에게 기꺼이 물려주고 조용히 물러날 때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가 지역구를 잘 관리한다고 해도 자연인 이용희만을 보고 표를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지역구는 다른 곳에 비해 주민들의 정치 의식이 높은 곳으로 소문나 있다. 이것은 이용희를 보고 표를 준 사람들도 있지만 그가 소속한 정당 그리고 전체 한국의 정치 상황을 고려한 투표임을 생각해야 한다. 이용희를 보고 무조건 표를 던졌고 또 던질 것이라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향상된 지역 주민들의 정치의식을 70, 80년대 보스 정치가 통했던 저수준에 묶어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동은 절제력과 통제력을 상실할 때처럼 위험할 때가 없다. 지역구 단체장들을 뒤에 세우고 하는 그의 기자회견 사진이 마치 지난날의 빛바랜 흑백 사진을 보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이유는 왜일까? 세상은 변하고 있다. 정치도 예외일 수 없다. 한 사람의 노욕에서 비롯된 행동이 이런 변화의 흐름을 거스르는 발버둥 같이 생각되어 마음이 상쾌하지 못한 화요일 아침이다. 그래서 나는 이형기의 시 ‘낙화’를 찾아 읽었는지도 모른다.


#노욕#이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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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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