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불타버린 숭례문
 불타버린 숭례문
ⓒ 김관숙

관련사진보기


웅장한 모습으로 남대문은 늘 언제나 거기 있었습니다. 태조 때 만들어져 지금까지 그 기나긴 역사를 간직한 남대문을 특별히 국보 1호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국보 1호 라고 지정이 되기 이전부터 친숙했기 때문입니다.

남대문이 불길에 휩싸이는 TV 화면을 보는 순간 나는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 손을 잡고 골목을 나서서 큰 길에서 효자동 가는 전차를 탔습니다. 내가 다니게 될 중학교 사전 답사를 나서는 길이었습니다. 전차가 서울역을 지나서 갈 때 아버지가 나를 앞 쪽에 전차 운전수 바로 옆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남대문이란다."

남대문이 마주 보였습니다. 석축 가운데에 아치형의 문이 근사해 보였습니다. 그때 나는 말로만 듣던 귀중한 문화재인 남대문을 처음 보았습니다. 사방이 육이오 때 당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높은 누각형의 남대문은 신비할 정도로 온전했습니다.

전차가 남대문 바로 옆에 정류장에 서자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또 많은 사람들이 탔습니다. 아버지가 차창을 내다 보았습니다. 나도 따라서 차창으로 머리를 돌렸습니다. 다른 노선의 전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너머로 남대문의 석축과 마주했습니다.  나는 머리를 내밀어 꼭대기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아버지는 반가운 누군가를 바라보듯이 그런 빛이 도는 눈으로 석축을 바라보셨습니다. 나도 석축을 보았습니다. 석축은 틈 하나 없이 정교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시골 외가 동네서 만난 민들레 꽃이 여기 저기 핀 돌담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없는 나는 그런 생각만 하면서 남대문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눈빛을 나는 오랜 훗날에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십 초반에 처음으로 고향에서 기차를 타고 밤새 달려 서울역에 내렸다고 합니다. 남대문을 보자 드디어 내가 서울에 왔구나 하는 기쁨에 가슴이 뭉클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쉽지않은 서울살이는 그렇게 위용이 장엄한 남대문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전차표 매표소 앞에는 거지가 어슬렁거렸습니다. 당시에는 깡통을 손에 든 거지들이 많았습니다. 뽀글 퍼머에 한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전차표를 사고 남은 거스름 돈을 간절한 얼굴로 앞을 가로 막는 거지에게 주고 돌아섭니다. 여자가 천사같아 보였습니다. 나도 전차표를 사고 거스름 돈이 남으면 거지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허름한 옷에 사십 대로 보이는 두터운 성경책을 옆구리에 낀 남자가 석축을 등지고 서서 붐비는 사람들과 내가 탄 전차를 향해 "예수를 믿읍시다아" 하고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귀 기우리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남자의 선교가 오늘이 처음이 아닌 모양입니다.

전차가 움직였습니다. 시청 쪽과 을지로로 갈라지는 남대문 삼거리에 순경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하얀 장갑 낀 손으로 교통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예쁜 여 순경입니다. 창가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씩씩한 여 순경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도 바라보았습니다. 

등교 시간이면 효자동 가는 전차는 늘 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말씀대로 남들 보다 20분 정도 일찍 집을 나서서  텅텅빈 전차를 타고는 했습니다. 전차가 남대문 정류장에 이르면 나는 차창으로 석축을 내다 보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다 보았습니다.

그 무렵에는 서울 4대문 이름이 오행사상을 따라 지었다는 것도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 글씨가 양녕대군의 친필이라는 것도 숭례문 현판이 세로로 달린 것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서라는 이야기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대문이 예사로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학교 가는 길이 심심치가 않았습니다.

 숭례문, 간신히 남았습니다
 숭례문, 간신히 남았습니다
ⓒ 김관숙

관련사진보기


남대문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은 그 뿐만이 아닐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역사에 관한 책을 사려고 광화문 서점에 가 보았습니다. 어린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역사 관한 책은 안 보이고 일반 소설책들만이 보였는데 제목들이 흥미로웠습니다. 이후 나는 홀랑 소설책에 빠졌습니다. 삼국지와 무협지같은 책은 밤을 새워가며 읽었습니다. 자연히 학교 공부는 뒷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내게 따뜻하고 애틋한 추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남대문은 내게 자신이 품은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소설책들을 읽도록 유도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도 책 읽기를 좋아합니다.

늘 남대문 전차 정류장에서 내가 탄 전차를 타던 내 또래에 남학생이 생각납니다.교모를 눌러 쓰고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그 남학생은 전차를 타고 가다가 중앙청 앞 정류장에서 내려 안국동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했는데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 얼굴인 나는 그 남학생의 하얀 피부와 큰 키가 부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전차 안이 텅텅 비었는데도 그 남학생이 내 옆에 와 앉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무릎에 책가방을 꼭 잡고 옆으로 조금 비켜 앉았습니다.

"넌 맨날 왜 나만 보냐? 부담되게."

난 못들은 체 합니다. 나는 석축을 보았을 뿐입니다. 아니 남대문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남학생의 기분 나빠하는 목소리와 큰 키에 질려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다음날부터 나는 10분 더 일찍 집을 나서곤 했습니다. 

몇 달이 지났습니다. 그날도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숭문사에 갔습니다. 아침에 용돈을 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용돈을 주면 한 달분 전차표 값을 떼어 놓고 그간 생각해 둔 소설책이나 시집 한 권을 삽니다.

"너네 이사 갔니?"

숭문사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가 아주 반가워하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남대문 그 남학생이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책을 고르다가 씩 웃고 있습니다. 나는 또 모른체 했습니다.

'야, 난 석축만 봤다니깐.'

그러나 속으로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쟨 무슨 책 사러왔나 몰라.'

"너 입 붙었니? 보기에도 꼭 붙은 입 같다"

나는 홍당무가 되어 팽글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숭문사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어머니는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이 다가오면 동네 아주머니들과 같이 장을 보러 남대문 건너편에 신창안장을 다니고는 했습니다. 신창안장에 가면 없는 것이 없을뿐만 아니라 동네 장보다 무엇이든지 훨씬 쌌고 덤도 솔치않게 얹어 주었기 때문인데 장을 보러 갈 때는 전차표 값을 아끼려고 몇 정류장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갔습니다. 물론 돌아올 때는 장 보따리가 무거워서 전차를 타고 옵니다.

"걸어가면 다리 아프잖아?"
"걷다보면 금방 남대문이 보인다구. 남대문만 보이면 신창안장 다 간거나 다름 없지 뭐."

어려운 시절이라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남대문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거리에서 이정표 구실도 했습니다.

화면에 나온 화재로 붕괴된 남대문 모습은 그야말로 뭐라고 표현을 할 수가 없게 처참했습니다. 내가 가서 보았을 때는 가림막으로 빙 둘러져 있었습니다. 2월13일, 찬바람이 불고 추운 날씨였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디카나 휴대폰으로 가림막 위로 들어난 잿더미를 찍고 또 찍고 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한결같이 안타까움과 짙은 애도의 빛이 어리어 있었습니다.   

손이 시려서 디카를 가방에 넣고 돌아섰다가 끌리듯이 다시 뒤돌아 보았습니다. 가리막 위로 보이는 검은 잿더미가 자꾸 나를 끌어 당기기도 하였지만 거기 잿더미에 뭔가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조상님들의 혼과 얼입니다. 혼과 얼은 그 맹렬한 불길에 타지 않았습니다. 거기 석축 기반위에 검은 잿더미를 지키며 푸르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음식을 차려놓고 하얀 국화송이도 놓고 눈시울을 적시며 추억을 얘기하며 추모를 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마른 잔디 광장을 돌아서서 나오는데 뒤에서 그 옛날 젊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남대문이란다."

아버지의 목소리도 거기 살아있었습니다.

 추모의 마음이 모이었습니다
 추모의 마음이 모이었습니다
ⓒ 김관숙

관련사진보기



#숭례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