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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수는 최남선이나 이광수 등이 벌이는 개화, 계몽 운동에는 아예 경멸감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입만 열면 조선 민족을 이유 없이 폄하했다. 언필칭 애국자인 그들의 글에는 도무지 진실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독자를 감동시키는 글을 쓰지 않고 독자의 인기를 얻어내는 글을 쓴다고 그는 생각했다.

총독부에서 놓은 경부철도를 예찬하는 노래를 지은 최남선은 김태수가 보기에 더 이상 민족주의자일 수가 없었다. 친일 단체 일진회의 돈으로 유학을 갔다 온 이광수의 글은 더 한심하다고 그는 평가하고 있었다. 이광수란 사람은 민족을 개조해야 한다는 식의 무모하고도 엄청난 발언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김태수가 가장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것은 민족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발언이었다.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이광수를 그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최남선이나 이광수는 모두 김태수처럼 중인 계급 출신이었다. 김태수는 중인이 갖는 시대적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중인들이 맑은 영혼을 갖기란 매우 어렵다는 편견을 그는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진정한 조선 양반을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양반들에게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도 신규식 선생 같은 이에게는 진정으로 흠모의 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손깍지를 하고 보료 위에 심드렁하게 누워 있던 김태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 자기는 양반 따위나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오윤정을 만나는 말일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그에게 고문처럼 힘든 일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태도를 바꿔 자기를 만나자고 한 이유를 그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손탁 호텔에서 자기에게 다가와 말을 붙였던 오윤정의 태도에는 진실성이 있어 보였다는 점이었다. 경무총장의 눈을 피해 말하는 그 와중에도 그녀는 당당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김태수는 그런 것을 직관할 줄 아는 청년이었다. 그는 진짜와 가짜를 알아채는 데에는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 듯싶었다.

김태수는 광통교 책거리에 하인을 보내 닥치는 대로 책을 구해 읽었다. 유달리 할 일도 없었을 뿐더러 오윤정과 만나기 전까지는 도무지 아무것도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 책뿐 아니라 서양 책도 구해 읽었다. 많은 책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조선 실학자들과 풍류객들의 저작물들이었다. 그는 조선의 소설들도 이미 거의 읽었다. 그 중에서 판소리 소설들이 압권이라고 그는 느끼고 있었다. 그는 기회가 오는 대로 남도에 가서 판소리들을 들어야겠다고 다시 마음먹었다.

그는 바깥나들이를 일절 하지 않았다. 더러 명월관 주옥경이 떠오를 때가 있었지만 왠지 그는 오윤정을 만나기 전에 다른 여자를 보고 싶지 않았다. 다만 집에 찾아온 족보 파는 양반을 한 번 직접 만났을 뿐이었다. 양반은 침통한 낯으로 김태수가 주는 돈을 받아 갔다.

사실 김태수는 자기 집안의 본관도 잘 모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우리는 광산 김씨라고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는 그것이 거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아버지가 광산 김씨 족보를 사들이는 것을 보면 자신의 의심이 옳았음을 알 수 있었다. 광산 김씨가 아니니까 광산 김씨 족보를 일부러 돈을 들여 사는 게 아니겠는가?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김태수는 오늘이 오기까지 한 달 동안 두문불출 책만 읽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책을 읽다가 새벽녘에야 눈을 붙인 날이 많았다. 그는 인력거 휘장을 젖히고 손바닥으로 빗방울의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그것은 비라고 할 수도 없는, 안개 같은 수증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시야는 뿌옇게 흐려 있었다.

“학문에 정진하는 열의가 꼭 신규식 공 같구나.”

김태수의 아버지 김인용이 주야로 책만 읽는 아들을 신통하게 여긴 나머지 한 말이었다. 마침내 김태수는 오윤정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기다린 시간이 너무도 길었던지, 오히려 그의 심정은 차분해져 있었다.

연못 너머 나무에 황강이 매어져 있었다. 그녀는 벌써 와 있는 것이었다. 다시 김태수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슬비를 맞으며 황강 쪽으로 걸어갔다. 황강도 김태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뻗어 황강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물이 묻어났다. 황강의 옆구리에도 물방울들이 미세하게 배어 있었다. 그녀는 꽤 오래 전에 온 듯싶었다.

김태수는 활터로 걸어 올라갔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는 활쏘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녀는 옥색 비단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그는 먼발치에서 그녀를 호젓이 지켜보고 싶었다. 활을 잡아끄는 그녀의 동작에는 작은 군더더기 한 점이 없었다. 완전히 힘을 뺀 어깨와 전혀 움직이지 않는 머리, 화살이 나가고서도 조금도 흐트러트리지 않는 마무리 자세 등, 어느 모로 보나 그녀는 완벽한 궁술의 소유자였다.

아까부터 김태수 말고도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두 사내가 있었다. 그들은 똑같이 긴 구두를 신고 잠바를 입고 있었다. 눈 여겨 보니 그들 손에는 때 아니게 장갑도 끼여 있었다. 그녀의 연습이 거의 끝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마지막 시위를 당긴 후, 작은 수건을 꺼내 이마에 배어 있는 땀을 닦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김태수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김태수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에게 침착한 목례를 보냈다. 그를 발견한 그녀는 정답고도 화사한 웃음을 짓더니, 땅에 떨어뜨린 물건이 있었는지 허리를 숙였다.

바로 그때였다. 아까부터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사내 둘이 그녀에게로 소리 없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민첩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도 어떤 낌새를 차렸는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에 확연한 긴장감이 나타났다. 그녀는 좌우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러자 두 사내의 손에서 동시에 재크나이프가 펼쳐졌다.

그녀가 손을 뻗어 봇짐에서 뭔가를 꺼내려는 순간 오른 쪽으로 다가가던 사내의 손등이 그녀의 손목을 올려 쳤다. 그녀의 손에서 권총이 튕겨져 나가며 허공을 핑그르르 맴돌았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는 담장으로 막혀 있었다. 두 사내는 격렬하게 저항하는 그녀의 팔을 양쪽에서 억세게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거칠게 그녀를 끌고 활터 아래로 내려갔다.

김태수는 기민하게 활터에서 내려왔다. 그는 황강이 있는 쪽으로 갔다. 그는 끌려 내려오는 그녀와 두 괴한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두세 번 어깨를 틀며 괴한의 손길을 뿌리쳐 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황강 옆에 서 있는 김태수의 모습을 힐끗 보았다.

김태수는 황강의 고삐를 잡은 채, 세 사람을 시야에서 확보하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일본군 자동차 한 대가 그들 앞으로 가고 있었다. 김태수는 한 손으로는 황강의 고삐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황강의 콧구멍을 틀어막고 있었다. 말은 코로 밖에 숨을 못 쉬는 동물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황강의 턱을 손으로 받쳐 머리를 들어 올려 그들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은 말의 눈에, 위기에 처한 주인의 모습이 포착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기회를 노리던 김태수는 두 손을 동시에 풀어 놓으며 황강의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갈겨버렸다. 황강은 무섭게 앞 다리를 치켜 올리며 울부짖더니 그들 쪽으로 돌진해 갔다. 황강이 세 사람을 짓이겨 버리듯이 덮친 다음 자동차 옆을 엉덩이로 받으며 갈지자로 달려 나갔을 때, 그녀는 이미 황강의 등 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김태수는 반대 편 숲 속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김태수는 새벽 잠 자리에서 하인들의 고함 소리를 들었다.
“나리, 왔어요. 왔습니다.”
김태수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왜 남의 잠을 깨우는 거냐?”
“황강이 돌아왔습니다. 나리.”

황강은 다소곳이 서서 눈을 꿈벅이고 있었다. 김태수는 말의 고삐에 묶여져 있는 옥색 비단 두건을 발견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조심히 두건을 풀었다. 예감대로 두건에는 그녀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사실은 말을 돌려 드리려고 만나자고 했던 것인데, 오히려 당신이 나에게 예기치 않은 생명을 주셨습니다. 나를 보는 당신 눈빛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고 또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조국의 국경을 넘고 있습니다. 나는 당분간 중국 항주에 머무를 것 같습니다. 물론 말은 이제 당신의 것입니다. 

추신 : 당신의 눈빛은 저에게 환각보다도 더 진했습니다. 안녕히. 제 이름은 백주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과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환각#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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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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