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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14일 제주국제공항 유골 발굴 현장의 한 구덩이에서는 36구의 유골과 함께 두 개의 인장이 따로 발견되었다. 60년 어둠의 세월에 마모되어 희미해진 인장 하나에는 ‘희전(熙銓)’, 다른 하나에는 ‘양봉석 (梁奉錫)’이라고 각자(刻字)되어 있었다.

며칠 후 제주대학교 조사단은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47년, 제주도 대정국민학교에는 김희전 교사가, 의귀국민학교에는 양봉석 교사가 교편을 잡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일이 손에 안 잡힙니다. 유해가 옮겨지기 전에 형님께 술 한 잔을 올리고 싶습니다."

양봉석 교사의 아우 봉천씨(60.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는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연합뉴스 2007.11.14일자 참조)

제주국제공항에는 최소 500명에서 700명까지의 희생자가 암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에는 정뜨르 비행장이라고 불렸던 이곳에서는 1949년 2차군법회의 사형수 249명과,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도내 예비 검속자 500명(추정) 등이 총살, 매장되었다고 보고되었다.

여기 말고도 다른 학살 현장의 증언들도 부지기수로 줄을 잇는다.  

“군 트럭에 실려 온 주민 30여 명이 이곳에서 총살된 뒤 가릿당 동산에 암매장되었습니다.”

“화북국민학교에 집결해 있던 도피자 가족 중 일부는 학교 운동장에서, 여자들은 트럭에 태워져 누러이(제주교대 남서쪽)에서, 남자들은 고우니모루 저수지에서 총살되었습니다. 그때 저수지 물이 핏빛이었지요.”

유족들의 증언은 각종 매체에 선연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들의 말을 취합해 보면 제주도 내 학살 현장은 66곳에 이른다. 희생자가 수만을 헤아린다고 하니, 이에 비하면 66곳이라는 현장 숫자가 결코 많은 것은 아니다. 이 중에서 우선 집단 학살 지역 11곳의 조사만 이루어지고 있거나 예정되어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골은 1992년 4월 제주 다랑쉬굴에서 11구, 1994년 3월 애월읍 밭이오름에서 1구, 2003년 9월 현의 합장지에서 39구, 제주시 화북천에서 2구, 별도봉 동굴에서 3구 그리고 가장 최근인 2007년 11월 정뜨르 비행장(제주국제공항)에서 36구 등이다.

4·3 희생자 유골 발굴 작업은 3단계로 나뉘어 실시되고 있다. 지금은 2단계 작업이 진행 중인데, 앞서 말한 제주공항의 유골 발굴은 2단계 작업의 성과였다. 3단계 작업은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2009년에 시작하는 것으로 기약되어 있다. 그때에는 남원읍 의귀리 송령이골, 제주시 구오일 시장 일대 등이 발굴 대상지역으로 되어 있다.

정상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4·3 학살의 전개 양상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이날 제주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과 김익렬 연대장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졌다(1948. 5. 5)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이날 제주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과 김익렬 연대장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졌다(1948. 5. 5)
ⓒ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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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극적인 대량 참극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로부터 해방된 둘째 해인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비롯된다. 물론 당시는 대한민국이 없던 미 군정 치하였다. 해방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그 해 3·1절 기념식에는 무려 3만의 제주도민이 참석했다. 당시 제주도는 전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향의 지역이었다. 해방 후 이방을 떠돌던 6만 명의 해외 유입 인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념식이 파할 무렵 일부 군중들이 “통일조국전취”를 외치며 대로로 나섰다. 이때 난데없이 경찰의 총성이 울린다. 이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이 무모한 발포로 인해 관덕정과 도립병원 앞에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입게 된다.

닷새 후인 3월 5일, 3·1 사건 대책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된다. 이어서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일제 때에도 전례가 없었던 민·관 총파업이 이루어진다. 제주도 전체 직장인의 95%가 참여한 파업이었다. 이것은 당시 군정의 사후 대책이 얼마나 미흡하고 부당했는지를 명백한 반대급부로 일러준다.

다시 일주일 뒤인 3월 12일에는 경무부 최경진 차장(경무부장 조병옥)이 제주 파업 사태를 언급하면서,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고 발언한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매카시즘이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1년 동안은 그 다음의 참상에 비한다면 그리 많은 희생자가 난 것은 아니었다. 당국이 어느 정도 단속과 선무(宣撫)를 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로 내도(來島)한 반공단체 서북청년단에 대한 불만이 차츰 고조되어 가고 있기는 했다.

불행히도 1948년 3월 14일 모슬포 지서에서 청년 양은하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보고 받은 남로당 제주위원회에서는 ‘단정반대’의 행동목표와 ‘무장투쟁’의 행동강령을 최종 확정한다.

한편 이런 제주도민의 분위기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이승만은 3월 28일, 방한한 미 육군성 드레퍼 차관에게 제주도를 미군 군사 기지로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피력한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회합을 갖고 무장 투쟁 개시일을 4월 3일로 확정지었다. 급기야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제주도 남로당 무장대가 도내 12개 지서와 우익 인사의 집을 습격한다. 이어 미 군정장관 딘이 극비리에 제주도를 방문한다. 직후 김정호 제주 비상경비사령관은 “밤 8시 이후 통행금지 위반자는 사살하라.”는 섬뜩한 명령을 내리게 된다.

5월이 되도록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미군 수뇌부는 “무장대를 총공격하여 사건을 단시일 내로 해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6월 2일에는 제주 주둔 미군 사령관 브라운 대령이 “제주도의 서쪽에서 동쪽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진행시키고 있다”고 밝힌다.

이윽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발한다. 도민들의 불안감은 적중하여 닷새 후인 8월 20일에는 800명의 경찰이 제주도에 증파된다. 이승만은 법조문에도 없는 계엄령을 반포하여 무자비한 토벌작전을 감행한다. 결과 사태는 일단 진정 국면으로 들어선다. 해안 5km 이상의 중산간 지대 마을이 모두 토벌의 표적이 되어 무도하게 가옥이 불살라지고 최소 1만2000명 이상의 주민이 다 죽어나간 후였다.

1950년 5월 30일에는 제주도 국회의원 선거가 무사히 치러진 것으로 보아 항쟁은 거의 진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동안의 피해는 실로 무자비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시점에 도지사가 발표한 인명 피해자가 3만 명에 이를 정도였던 것이다. 1000명 이하에 불과한 무장대원을 진압하기 위해 수만 명의 양민을 무차별로 희생시킨 것이었다.

제주도민을 두 번 죽인 한국전쟁

 △ 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제주사람들.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주로 보인다(1948. 5)
 △ 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제주사람들.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주로 보인다(1948. 5)
ⓒ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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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6일 ‘전 제주지구 예비 검속자 명부 제출의 건’이 제주도 경찰국장에게 하달된다. 이때부터 예비 검속자에 대한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지게 된다. 주정공장 수감자들이 사라봉 앞 바다에 수장되고, 서귀포 관내 수감자 150명이 바다에 수장되었으며, 또한 제주경찰서 등지에 수감되어 있던 예비 검속자 수백 명이 제주 앞 바다에 수장된다.

1950년 8월 19일 밤에는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던 500명 이상이 제주 비행장에서 총살된 후 암매장된다. 8월 20일에는 모슬포 관내 수감자 252명이 군에 송치되어 송악산 섯알오름에서 집단 총살된다. 아울러 섬이 아닌 목포형무소 수감 제주인과 대전 형무소 수감 제주인 300명이 여수 순천 관련자 700명과 함께 영문도 모르는 즉결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1950년 10월 10일에는 제주도 계엄령이 해제되고 잔류 예비 검속자가 석방된다. 이로부터 4년 후인 1954년 1월 15일 제주도 경찰국장은 잔여 무장대가 6명뿐이라고 발표한다. 이들이 마저 소탕된 1954년 9월 21일에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됨으로써 4·3사태는 7년 7개월 동안의 악몽 같은 장거리 터널을 외면상으로나마 벗어나게 되었다.

제주도민을 세 번째로 죽이는 위원회 해체

4·3 항쟁의 초기에는 남로당 제주위원회가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월간조선>이나 극우단체들의 주장대로 제주위원회가 북과 연락되었다는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북의 지령으로 폭동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흑색선전에 불과한 것이다.

아직 희생자의 유해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내년에는 60주년 행사가 준비 중에 있기도 하다. 그들은 그때가 되면 “시산혈해(屍山血海)의 4·3, 꽃으로 피어나라”고 염원할 것이며 지난날의 모든 원한을 풀고 상생하기를 바라는 해원상생(解怨相生)의 굿판을 펼칠 작정이다. 

그러니 어떠한 명분으로든지 4·3 위원회의 해체는 부당한 일이다. 하물며 그들에게 또 빨갱이의 덧칠을 한다면야 그것은 인면수심밖에는 되지 못한다. 또 설사 그렇다 한들, 다시 말해 그들이 빨갱이라 하면 어쩔 것이냐? 죽은 이들을 찾아 진혼을 해야 하는 것은 보통 인간의 보편적 도덕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4·3위원회는 한나라당까지 합세하여 만든 공법적 기관이다. 노 대통령의 4·3 공식 사과는 역사적인 의미를 띤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나라든지 어두운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라는 없다. 그런데 이른바 선진국일수록 진상 규명과 화해에 적극적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기들에게 이로운 줄을 알기 때문이다. 4·3 항쟁은 2차대전 후 벌어진 세계 최대의 양민 학살극이다. 물론 이런 어두운 과거를 낱낱이 밝힌다고 해서 앞으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과거를 묻어 들 경우 이런 불행은 틀림없이 재현될 것이다.  


#4.3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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