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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튼 두 사람은 내심 서로를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런 세계관의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는 듯했다. 두 사람은 광통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불었다. 필호는 도애의 몸에서 스며나는 매혹적인 향기를 맡았다.

예로부터 여자의 기운을 일컬어 음기라고 했다. 달은 아름다운 음기를 발산하는 신비로운 천체였다. 그런데 여자가 달밤에 다리를 밟는 것은 생식력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다. 다리를 함께 밟으며 눈을 맞춘 청춘 남녀는 필경 생식의 아우라짐을 이룬다고도 하였다. 필호와 도애는 다리를 밟으며 눈을 여러 번이나 맞추었다. 분명히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매혹되어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 날 보름달은 오르지 않았다. 저녁부터 흐려진 하늘은 이제 곧 눈발이라도 뿌릴 것처럼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물론 별빛도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한양에서 가장 큰 광장인 광통교 부근은 노새 북적거렸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마냥 즐겁고 태평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과 가까이 있는 종루의 천시는 무엇을 알리고 있었을까? 그들은 그런 것을 도무지 염두에 두지는 않고 있었다.

두 연인은 환구단이 있는 소공동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호텔을 신축하기 위한 토목 공사장 옆을 지났다. 호텔은 외국 사신을 영접했던 남별궁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었다.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가 이곳에 살았다고 했다. 그 집을 가리켜 작은공주 댁 혹은 소공주 댁이라고 불러서 오늘날 소공동이 된 것이었다.

가벼운 눈발이 희끗거리는가 싶더니 금세 송이 눈으로 바뀌어 갔다. 두 사람의 머리에도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필호는 도애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대어 눈을 털어 주었다. 그러자 도애는 까치발을 하고 필호의 머리를 만졌다. 처음 만날 때만 해도 키가 비슷했던 두 사람이었는데 이제 필호는 도애보다 한 뼘 이상은 더 큰 것 같았다.

도애는 함께 가 볼 데가 있다고 했다. 가깝지는 않지만 그냥 걸어가자고 말했다. 그들은 나란히 종로로 걸어갔다. 동대문 쪽으로 가는 전차 불꽃이 파랗게 번쩍거렸다.

도애가 필호를 데려간 곳은 채소 시장이었다. 그러나 필호는 시장 입구에 서 있어야 했다. 남자는 들어갈 수 없는 여인 채소 시장이었기 때문이었다. 필호는 말로만 듣던 여인 채소 시장이 신기했다. 그리고 밤늦은 시간에 장이 열리고 있는 것도 이채롭다고 생각했다.

필호는 들락날락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조금 계면쩍기도 했다. 그런데 필호만 그런 게 아니었나 보았다. 자기처럼 시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남자들이 몇 더 있었는데 모두들 필호처럼 멋쩍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숭인동 여인 채소 시장에도 조선조 굴곡의 역사가 관련되어 있었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가자, 단종 왕비 송씨의 생활은 극도로 궁핍해졌다. 그녀는 이곳 암자만한 초가에서 살았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아직 세 명의 의리 있는 시녀가 남아 있었다.

동네 주변 아낙네들은 단종비 송씨가 가여웠다. 그래서 아낙들 몇이서 이곳에 좌판을 깔고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송씨의 시녀가 오면 돈을 받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시작한 장사였다. 수양대군의 서슬이 얼마나 파랬기에 왕비에게 채소 주는 일도 위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기왕 제공되었던 채소이니 묵인하기로 했다. 그 대신 남자가 송씨에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여자와 7세 이하의 어린이에게만 출입을 허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물건을 간접적으로 대는 남자들도 자기의 신원을 감출 수가 있었다. 그러자 꽤 많은 물량이 들어오게 되어 차츰 시장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었다.

도애는 보퉁이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필호에게 보퉁이를 건넸다.

"오미자입니다. 청년 건강에 아주 좋다고 하지요. 이걸 오래 물에 담아 놓으면 빛깔이 우러나온답니다. 사실은 그래서 산 것이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빛깔입니다. 제가 없을 때 이 실과의 빛깔을 보며 저를 생각해 주셔요."

용천에서 기차를 내려 말로 갈아탄 신규식이 압록강에 다다른 것은 황혼 무렵이었다. 그는 자작나무 사이로 강이 내려다보이는 산비탈 주막에다 여장을 풀었다. 철교가 개통되어 중국 단동까지 기차로 갈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정확하지 않은 정보였다. 압록강 철교는 개통되었지만 의주역 선로 연결 작업이 예정보다 늦어져 기차는 용천까지밖에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신규식은 말을 구입하여 타고 온 것이었다.

내일 동이 트자마자 강을 건너기로 한 신규식은 베게에 머리를 붙였다. 아내 정완과 딸 명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규식은 독립 운동이 자리를 잡아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날에는 처자를 꼭 부르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내일의 긴 여정을 생각하여 잠을 청했지만 쉽사리 잠이 와줄 성싶지 않았다.

동트는 해를 바라보며 중국 땅에 들어가려 했던 신규식의 작은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범선을 통과시키기 위해 다리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일 자 철교가 움직이기 시작해서 열 십 자로 바뀌어 배가 통과한 다음,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와 정돈되기까지 한 시간 남짓, 그는 말 위에서 초초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철교 입구에 게양된 빨간 깃발이 내려지고 파란 깃발이 올라갔다. 철교 통과를 허락한다는 신호였다. 신규식은 철교 오른쪽 보도 입구를 바라보며 말의 박차에 힘을 주었다.

압록강(鴨綠江)... 물빛이 오리의 머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물길 이천 리 압록은 조선에서 가장 긴 강이었다. 또한 압록은 조선에서 가장 넓은 강이기도 했다. 한반도 면적의 6분의 1이 물이 되어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압록은 그렇게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물이 없으면 야박해지고 물이 넘치면 급박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물이 많으면 사람은 온후해지는 법이었다. 어찌 보면 강팍해 보이기도 하는 신규식의 얼굴에는 이례적으로 관용의 품격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말고삐를 늦추고 섬과 섬들을 다소곳이 어루만지며 흐르고 있는 압록에 넋을 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즉흥으로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강물은 저렇게 흘러가는데
우리는 어느 날 고향 찾을까
수많은 의양자 참았던 분노
그 슬픔 물결에 가득 차 있네.
 *의양자(宜陽子) : 한나라 독립 운동가 장양(張良)                      

뾰족뾰족한 냉대림들이 강 유역에 펼쳐져 있었다. 전나무, 삼나무, 가문비나무 등, 강 너머는 끝없는 수해(樹海)를 이루고 있었다. 멀리 위화도가 눈에 들어왔다. 위화도는 압록강의 물살이 옮겨 만든 흙으로 이루어진 아주 작은 섬이었다.

위화도를 본 신규식은 새로운 감회에 젖어 들었다. 저 주먹같이 작은 섬에서 조선왕조 500년을 다지는 역성혁명이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혁명의 기운은 누구도 예상 못한 곳에서 발아되는 것이었다. 위화도를 보는 신규식은 정부 수립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다지고 있었다.

강을 건넌 그는 조금 더 가다가 말에서 내렸다. 주막에서 말안장에 걸어 준 도시락이 있었다. 주막 노인은 한눈에 신규식의 사람됨을 알아보았다. 노인은 무역을 하러 중국에 간다는 신규식의 말을 드러내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손톱만큼도 믿지 않는다는 표정만은 끝내 지우지 않았었다.

노인은 자기가 한양 종루 옆에서 점과 관상을 보던 사람이었노라고 했다. 젊었을 때는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이름을 김을부라고 소개했다. 그는 장안에 득실거리게 된 왜놈들 보기가 싫어 고향으로 왔다고 했다.

신규식은 자신의 이름을 신 정이라고 말했다. 중국에 가면 사용할 이름이었다. 노인은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유감이나 불만의 기색은 없었다.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는 표정이었다.

"집 안에 짙은 시름의 기운이 있어 방을 찾았더니 이 방이었소. 괜찮으시다면 이 늙은이와 대화를 좀 하시는 게 어떻소?"

노인이 방문 밖에서 헛기침을 한 후, 비스듬히 문을 열고 한 말이었다. 신규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을 맞이했다. 노인은 신규식의 흘겨보는 눈에 담긴 사연을 묻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

"공의 지나친 시름이 그대의 생명까지를 앗을 뻔했구려."

노인은 자기가 광통교의 청개구리 점쟁이라고 말했다. 그제야 신규식은 노인을 안다고 했다. 사실 청개구리 점쟁이가 아주 용하다는 말을 신규식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청개구리 점쟁이는, 흉하다 하면 길하고 급제한다 하면 낙방한다는 식으로 반대로 말해 준다는 것을 신규식은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이제는 늙어서 점을 잘 못 봅니다만 뜻밖에 지사를 만나 뵈니 옛날 기운이 준동하는구려."

신규식은 자세를 바로잡아 앉았다. 점 같은 데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그였지만 왠지 노인의 언행에서 진정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공의 소망은 이루어집니다. 다만,"

노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 이제 신규식은 다음 말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계속)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이틀에 한 번 짝수일에 게재됩니다.



#다리밟기#여인전용시장#압록김치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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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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