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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 선생(왼쪽)과 아들아이(오른쪽) 문턱없는 밥집에서 윤구병 선생과 아들아이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윤구병 선생(왼쪽)과 아들아이(오른쪽)문턱없는 밥집에서 윤구병 선생과 아들아이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 ⓒ 이명옥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방학조차 없는 아들아이에게 지난 24일은 보충수업을 하지 말고 일찍 오라고 일주일 전부터 단단히 단도리를 해 두었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문턱 없는 밥집 2층 강당에서 열리는 ‘2008년 작은책 강좌’의 3번째 강사가 바로 존경하는 윤구병 선생이었기 때문에 아들아이와 꼭 동행하고 싶었던 것이다.

 

윤구병 선생은 “나는 왜 농부가 되었는가?”라는 주제로 2시간 동안 농부가 되어 진실한 삶의 시간을 되찾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었고, 역시 나의 기대는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윤구병 선생 2008년 작은책 강좌 3번째 강사인 윤구병 선생이 "나는 왜 농부가 되었는가?"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윤구병 선생2008년 작은책 강좌 3번째 강사인 윤구병 선생이 "나는 왜 농부가 되었는가?"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이명옥

철학자로 산 삶보다 더 행복하다는 농부의 삶

 

철학자라고 불리는 것보다 '농부'라고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농부철학자 윤구병 선생은
자신의 이름이 구병이 된 내력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윤 선생은 아버님이 상상력이 없어 돌림자 병에다 첫째부터 번호를 붙여주다 보니 아홉 번째 아들인 자신의 이름을 구병이되었다고 해 관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그는 자신 안에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말하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똥 이야기부터 시작하겠다면서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전쟁 직후 먹을거리가 없는데다 수년간 흉년까지 겹치는 바람에 걸렸다는 ‘허천병’이라는 ‘가성허기증’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윤씨 일가는 6·25 때 아홉 형제 중 형 여섯 명을 잃게 된다. 장대 같은 자식 여섯을 잃고 윤씨 일가는 1·4 후퇴 때 고향으로 낙향한다.
 
그때부터 학교에 다니지 않고 4년간 농사꾼이 되어 농사일을 배웠다. 전쟁 직후 모진 흉년이 이어지자 먹을 것이 없어 왕겨나 수수껍질을 갈아먹던 시절 소화되지 않은 셀룰로이드가 창자를 늘려가면서 아랫배에 쌓여 배만 볼록하게 나오고, 그것이 똥으로 나올 때 똥구멍을 찢고 나와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것은 은유가 아니라 직유라는 사실을 직접 체험했다는 윤 선생. 살아오면서 딴 짓을 하기는 했지만 자신은 처음부터 농부가 될 운명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윤 선생은 자신의 아버지가 지혜로웠다고 회상한다. 그가 삶의 시간을 자기 스스로 통제하는 법을 배운 것은 바로 농사를 짓던 어릴 적 4년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어릴 적부터 타율적으로 강제된 시간 속에서 살지만, 스스로 자기 시간을 통제하며 사는 그는 강제된 시간 속에서 산 세월이 비교적 많지 않다고. 그래서 어려움을 겪을 때 머리로 깊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삶의 길을 바꾸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목숨을 부지하러 사돈네 집 동네로 갔을 때 근처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고종사촌형이 “국민학교라도 나와야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다, 학비와 책값은 내가 댈 테니 아이를 학교에 보내라”고 아버지를 설득해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고 했다. 또 학비를 면제받는 특대생이 되기 위해 책을 외우고 또 외우던 중학교 3학년 시절, 사춘기와 더불어 시작된 가출은 해마다 그의 발걸음을 전국 각지로 떠돌게 만든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사진관에 가서 둘이 사진을 찍은 뒤 써주신 한문 네 글자의 뜻이 ‘마지막 끈’이라는 말에 자극받아 아버지를 위해 공부를 계속하여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다.
1학기 성적표를 받아 쥔 후 초생달(C)과 반달(D)이 주르륵 떠 있는 것을 보고 장학회에 미안한 마음었다고.

 

또 앙드레지드, 페이터의 산문 아울렐리우스 명상록을 원전으로 읽기 위해 독학으로 영어, 불어, 독어, 라틴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윤구병 선생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뿌리 깊은 나무 편집장, 도서출판 보리에서 어린이 동화책 내기,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글쓰기 연구회 등 다양하고 폭넓은 삶의 이력을 쌓았다.

 

공채로 합격해 15년간 충북대학교에서 철학교수를 하다가 교수 생활을 접고 농부가 된 까닭을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답답하더라. 아이들은 가슴에 온갖 질문들을 가지고 있는데 입 밖에 내서 질문을 못한다. 질문을 하려면 진도 나가자는 학생들이 꼭 있고(웃음) 대답없는 질문을 쌓고 쌓다가 4년이 되면 답답한 가슴으로 학교 문을 나서는 제자들, 질문 없는 대답에 대답까지 만들어가며 15년을 지내니 나도 불행해 지더라. 그래도 15년을 밍기적 거렸다. 95년도에 서울대 대학원생들에게 1년간 존재론 강의를 했다. 석·박사들에게 일주일에 한 강좌를 했는데 세 시간 짜리 당의를 하루에 몰아붙이고 다른 날은 변산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농사를 짓는 일과 강의를 하는 일은 병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농사일을 택했고 농사를 지으면서는 단 하루도 같은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생명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으로 나누게 된다. 진정한 만남은 자연의 시간이 만들어 낸 것이다. 자연은 자기 목숨을 바쳐서 생명을 살린다. 생명체의 본질은 자율성에 있다. 스스로 알아서 싹트고 열매 맺고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생명체의 삶을 책임지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다. 자연은 추상같다. 자연은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골라서  살리거나 죽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명령, 최소의 통제에 잘 따르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생기는 이유다.

 

도시에서는  자연의 시간에 비해 시간의 통제가 훨씬 강화되지만 인간의 시간은 텅 빈 시간이요 질적 차이가 없는 시간이다. 모두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하고 걸음마와 말을 배우는데서 부터 통제가 시작된다. 시간으로 통제되는 그 시간은 늘 반복되는 내용이 없는 텅 빈 시간이다. 그러나 자연의 시간은 늘 다르고 질적으로 꽉 차있고 무상한 시간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살아있는 시간이다. 

 

마을 대장간에 연장을 벼리러 오는 사람은 두 종류가 있다. 한사람은 칼과 창을, 또 한사람은 낫과 호미를 벼리러 온다. 창과 칼을 든 사람은 인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온다. 낫과 호미를 든 사람들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관계만으로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당신들은 컴퓨터나 시멘트를 소화해서 살 수 있는 힘이 있는가? 무기물을 유기물로 변화시켜 생명을 지속시킬 능력이 있는가? 늘 자신의 목숨을 바쳐 생명보시를 하는 유기물을 먹는 사람들이 몸을 놀려 창조적인 생산물을 만들어 나누려 하지도 않고 밥상에 유기물을 올리는 사람들에게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미안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했는데 열을 받다 보니 모든 문제가 여러분들에게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게 된다. 사실 이런 자리 싫어서 대학 그만두었는데…. 입 놀리는 것보다는 몸 놀리는 것이 좋고 몸 놀리는 것보다 마음 놀리는 것이 더 좋다.


아다시피 변산은 이념이나 종교 공동체가 아닌, 생활공동체다 원래 이름은 변산공동체 학교다. 함께 모여 살면서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능력, 더불어 사는 능력을 갖추고 아이들에게 가르치자는 의미다. 교육의 역할은 스스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사는 능력을 가르치는 것이다.


머리를 써서 살려면 높낮이가 다른 그런 삶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조금 부족해도 손발만 놀려도 살 수 있는 세상이 행복한 세상 아닌가?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칫 자기는 누릴 것 다 누려보고 행복하대.” 그러면서 그는 “미안하다. 하지만 농부로 사는 내 삶, 정말 행복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철학적 사유를 통해 머리에 가득 채운 존재적 가치를 가슴과 손과 발로 끌어내려 이런저런 다양한 방식으로 삶속의 실천 철학으로 육화시키는 작업에 몰두하는 진정한 자유인 윤구병 선생은 자신의 말대로 정말 행복해 보였다. 내 아이에게도 그 행복이 느껴졌을까?


#농부 윤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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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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