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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선 기차는 느릿느릿 갑니다. 북한강을 따라 달리며, 회색빛 서울에서 초록빛 강원도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지요.

봄여름에는 초록이 싱그럽고, 가을이면 단풍 보는 재미에, 요즘 같은 겨울에 눈이라도 한바탕 내려주면 설산을 구경하는 맛으로 두 시간이 훌쩍 가게 만드는 경춘선입니다.

십여 년 전 젊은이에게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준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복선으로 바뀌면, 계란을 파는 아저씨도 사라질 것이고, 정차 역에서 마주 오는 기차를 피하기 위해 한참 서 있는 배려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한 시간 안에 서울과 춘천을 잇는 다면, 춘천은 그처 서울로 출퇴근이 가능한 위성도시가 될 것입다.

친정이 있는 청계 9가에서 가까운 청량리역에서 출발해 두 시간이면 마지막 역인 남춘천 역에 닿습니다. 겨우 두 시간 거리지만 친정 부모님은 여간해서는 딸이 사는 춘천에 오시질 않습니다. 딸네 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는 게 뭐가 그리 짐스럽다 여기시는지 특별한 일이 있어도 겨우겨우 모셔 와야 합니다.

두살박이의 뒷모습 삼촌을 따라 잰걸음으로 생가 구석구석을 구경합니다. 낮은 굴뚝 두개가 정겨운 옛집입니다.
두살박이의 뒷모습삼촌을 따라 잰걸음으로 생가 구석구석을 구경합니다. 낮은 굴뚝 두개가 정겨운 옛집입니다. ⓒ 정진영

눈 내린 실레마을 ㅁ자형 겹집 안에서 내다본 실레마을. 며칠 전 내린 눈이 날이 추워서인지 그대로 있습니다.
눈 내린 실레마을ㅁ자형 겹집 안에서 내다본 실레마을. 며칠 전 내린 눈이 날이 추워서인지 그대로 있습니다. ⓒ 정진영
오랜만에 춘천에 오신 부모님과 함께 '김유정 문학촌'을 찾았습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차로 가는 것보다 기차를 타고 김유정역에 내려 걷는 방법이 더 좋습니다. 여행하는 맛도 나고, 역에서 그리 멀지 않아 어른 걸음이면 5분, 아이들 걸음이면 15분이면 족히 닿을 곳에 문학촌이 있으니까요.

김유정 역은 원래 '신남역'이었지만, 마을 전체가 김유정 소설에 등장하는 무대이고 김유정을 기념하는 곳의 대문이니 아예 이름을 '김유정역'으로 바꿨습니다. 저는 사람 이름이 기차역 이름이 된 이 간이역이 마음에 쏙 듭니다. 다른 지역에도 기릴 만한 인물의 이름을 딴 거리나 역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김유정 문학촌은 복원된 생가와 기념관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마을 전체가 소설의 공간 배경이라 문학촌이라는 이름이 허울이 아닙니다. 날씨가 춥지 않았다면 조금 가벼운 배낭에 물이나 한 병 담아 <봄봄>과 <동백꽃>의 무대를 걸었을 텐데, 우리가 찾은 날은 바람이 꽤 차가운 전형적인 강원도의 겨울날이었습니다.

'ㅁ'자 형 겹집은 추운 강원도에 적합한 구조입니다. 안에서 밖을 내다 볼 수 있도록 설계해 겹자집이지만 안마당에서도 실레마을이 훤히 보여 답답하지 않습니다. 이 집에서 생활을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문학촌 관리를 하는 분들이 방안에서 뭔가 의논을 하는지 툇마루에 앉아 있으니 두런두런 사람들 이야기 소리가 들립니다.

까만 솥이 궁금한 쿠하 군불을 지핀 작은 방 아궁이에는 무쇠솥이 걸려있습니다. 뜨거운 물이 찰랑거리며 김을 내뿜습니다.
까만 솥이 궁금한 쿠하군불을 지핀 작은 방 아궁이에는 무쇠솥이 걸려있습니다. 뜨거운 물이 찰랑거리며 김을 내뿜습니다. ⓒ 정진영

창고 옆에 딸린 작은 방에는 군불을 지폈는지 아궁이에 타다만 재가 있고, 까만 무쇠 솥은 열기가 남아있습니다. 까만 솥을 처음 본 쿠하(딸아이의 태명)가 할머니를 졸라댑니다. 성화 끝에 어머니는 솥에 든 뜨거운 물을 보여줍니다. 호기심이 왕성한 두살박이가 초로의 어머니는 마냥 귀엽기만 한지 해달라는 건 무엇이든 해 주십니다. 솥에 손을 넣겠다는 것만 빼고요.

오랜만에 보는 고드름은 괜히 반갑습니다. 어린 시절 처마 끝에 달린 고드름을 따다가 아이들과 서로 누구 것이 더 긴가 내기하고 장난치던 기억이 있는데 요즘 아이들은 처마가 없는 아파트에 살아서 우리가 느끼던 겨울 맛을 제대로 겪을 기회가 없습니다. 사라지는 것이 고드름뿐인 것은 아니지만, 왠지 겨울 풍경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합니다.

태어나 처음 보는 고드름 할머니한테 따 달라고 해도 안 통하자, 멀리 있는 삼촌을 찾아 나섭니다. 오랜만에 본 고드름이 괜히 반갑습니다.
태어나 처음 보는 고드름할머니한테 따 달라고 해도 안 통하자, 멀리 있는 삼촌을 찾아 나섭니다. 오랜만에 본 고드름이 괜히 반갑습니다. ⓒ 정진영
태어나 처음 보는 고드름을 쿠하가 그냥 지나칠 리 없습니다.

"엄마엄마(할머니를 그렇게 부릅니다) 저게 뭐야?"
"고드름이지, 쿠하야 추우면 지붕 끝에 얼음이 생겨."
"지붕이 뭐야?"
"저기 집 위에 있는 거. 이 집은 풀로 덮었네. 그래서 초가집이라도 불러. 지붕 끝을 처마라고도 해."

아이가 알아듣든 말든 어머니는 하고 싶은 설명은 끝까지 해주고야 맙니다.

"따줘, 저거 따줘."
"쿠하야 그냥 보는 거야. 차가워. 얼음이랑 똑같이 차가워. 할머니는 팔도 안 닿아."

짐짓 까치발까지 하는 시늉을 해 보이시면서 달래보지만, 아이는 할머니보다 키가 큰 삼촌을 찾아 나섭니다. 결국 제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야 말지요.

관광지의 안내문이나 사찰의 작은 푯말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친정아버지는 문학촌 바깥 보다는 실내 기념관에서 더 오래 머물렀습니다. 읽을거리가 많은데다, 오래된 신문 한 장도 놓치지 않고 하단 광고까지 꼼꼼하게 읽어보시는 중입니다.

소설 내용이야 책으로도 읽고, TV문학관으로도 여러 번 봐서 익히 알고 있지만, 김유정이라는 작가가 이렇게 단명했는지 미처 몰랐다고 하시네요. 쿠하랑 몇 차례 왔던 곳이라 대충 훑어보며 가족들 사진 찍기에 재미를 붙인 저는 몰랐는데, 아버지가 올해가 김유정 탄생 100주년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마 아버지의 설명이 없었다면 나중에 문학촌에서 여는 행사 안내 현수막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겠지요.

꼼꼼히 읽는 아버지 오래된 신문에는 신춘문예에 당선된 소설과 '용각산'광고가 함께 실려 있습니다.
꼼꼼히 읽는 아버지오래된 신문에는 신춘문예에 당선된 소설과 '용각산'광고가 함께 실려 있습니다. ⓒ 정진영

김유정 문학촌은 일반 관람객도 많지만, 등산복 차림의 손님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날씨가 좋은 단풍철에는 멀리 경상도나 전라도의 산악회 표지가 붙은 관광버스들이 오기도 합니다. 서너 시간 가볍게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김유정 기념관에 들러 지금껏 걸어온 길들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곳이었다는 것도 보고, 근처 막국수 집에서 '촌 두부' 한 모 시켜놓고 서둘러 막걸리 한 사발씩 걸치면 딱 좋을 코스입니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 저로서는 그림에 떡이지만 말입니다.

사람의 뒷모습만 찍는 사진가의 책을 본 적이 있는데, 사람마다 뒷모습의 향기가 다르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아이의 뒷모습을 제대로 본 것은 이번에 멀찌감치 떨어져서 사진을 찍으면서였습니다. 물론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무렵, 저 혼자 걷는 연습을 하면 혹시 넘어질 까봐 등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다닐 때 많이 봤지만 그 때는 온 정신이 아이의 다리에 집중돼 있어서 뒷모습이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큰 탈 없이 건강하게 두 해를 자라준 녀석이 괜히 대견하고 고마워지는 사진입니다.

꼬마 + 눈사람 작게 뭉친 눈 두 덩어리에 솔잎으로 팔을 붙이고, 솔방울 조각으로 두 눈을 만드니 그럭저럭 눈사람이 됩니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아이가 처마 끝 고드름이랑 셋이 다 나오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네요.
꼬마 + 눈사람작게 뭉친 눈 두 덩어리에 솔잎으로 팔을 붙이고, 솔방울 조각으로 두 눈을 만드니 그럭저럭 눈사람이 됩니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아이가 처마 끝 고드름이랑 셋이 다 나오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네요. ⓒ 정진영
겨울은 아이를 데리고 움직이기에 좋은 계절은 아닙니다만, 집 안에 갇혀 지내다보니 꼬마 눈사람 하나에도 한껏 신이 나나 봅니다. 삼촌이 만들어준 눈사람을 앉히더니 초가집 처마에 달린 고드름이랑 셋이 함께 나오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합니다.

올해는 김유정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백 해 전에 태어나 명창 박록주를 비롯해 두 번의 구애 실패 후에 고향 마을에 내려와 어눌한 말투로 야학을 이끌고, 동네 사람들을 관찰하며 소설을 썼던 병약한 젊은이를 떠올리니 크게 세워진 동상에도 불구하고 짧은 생애가 안쓰러운 생각마저 듭니다.

춘천시와 김유정 문학촌에서는 1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행사를 열 계획이라고 합니다. 낭만적인 '단선 경춘선'이 사라지기 전에 의자를 돌려 마주 않아 계란을 까먹을 수 있는 기차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요? 문학의 향기 가득한 실레마을로 말이에요.

김유정 문학촌에서 추천하는 등산코스
1코스
김유정역 ⇒ (김유정 문학촌) ⇒ 금병의숙 ⇒ 소와리골 ⇒ 만무방길 ⇒ 능선 4거리 ⇒ 산골나그네길 ⇒ 금병산 정산 ⇒ 봄·봄길 ⇒ 원창고개(3시간 소요)
관광버스로 오는 분들은 원창고개 정상에서 하차하여 산행을 한 뒤 금병의숙이나 김유정문학촌에 대기하고 있는 버스까지 오는 코스도 좋을 것입니다.

2코스
김유정역 ⇒ 김유정 문학촌 ⇒ 산국농장 ⇒ 금따는 콩밭길 ⇒ 능선 4거리 ⇒ 산골나그네길 ⇒ 금병산 정상 ⇒ 동백꽃길 ⇒ 산국농장 ⇒ 김유정문학촌(2시간 50분 소요)

3코스
김유정역 ⇒ 김유정 문학촌 ⇒ 금병의숙 ⇒소와리골 끝집 ⇒ 만무방길 ⇒ 능선 5거리 ⇒ 금따는 콩밭 ⇒ 제 2광장 ⇒ 동백꽃길 ⇒ 산국농장 ⇒ 김유정문학촌(3시간 소요)

덧붙이는 글 | 경춘선 기차는 느릿느릿 갑니다. 북한강을 따라 달리며, 회색빛 서울에서 초록빛 강원도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지요.



#김유정 문학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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