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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에 휩싸인 내 눈에도 그의 실체는 선명하게 보였다.
안개에 휩싸인 내 눈에도 그의 실체는 선명하게 보였다. ⓒ 우광환

 

내겐 중국에서 온 친구가 있다. 벌써 그를 처음 만난 것도 10년이 되었다. 참 빠른 세월이다.

 

가족과 멀리 떨어진 동경에서 홀로 터덜터덜 살아가던 그때, 나는 따뜻한 햇볕이 드는 한가한 날이면 아라카와 강가의 고수부지 야구장엘 자주 나갔다. 휴일 날에 거기는 가족들과 함께 나온 일반인 야구 동아리들로 늘 만원이었다.

 

한쪽에 앉아 가만히 그들의 게임을 구경하면서 그들 가족들이 즐겁고도 행복하게 응원하는 걸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그들의 웃음과 즐거운 함성은 어느새 내게 전이되어 자신도 모르게 헤벌쭉 혼자 웃기까지 했다. 그 순간엔 그렇게 그들의 행복이 내 것인 양 착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들을 휘감고 있는 행복과 나와의 간격이 멀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다시 우울해지고, 이내 정지되었던 내 안의 평화는 소리 없이 조각났다. 그럴 때면 내 발길이 거기서 멀지않은 강변의 갈대밭으로 옮겨 가 한적한 거길 서성거렸다.

 

혼자 산다는 것은 무한히 느껴지는 자유와 함께 끝없는 고독이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깨달은 척 하던 시절이었음에도, 어째서 이 자유로움 가운데서 자꾸만 따라다니는 약간의 고독이 속을 울렁이게 할까, 라는 것에 대해 나는 심도 있게 생각지 않았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목숨 바쳐 뉘우침 없어도 자유를 위해서라면 사랑이여, 내 너마저 바치리라’고 했던 헝가리 시인 페테피 산도르의 속내를 그 시절 나는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하긴 내 삶의 바깥쪽에 ‘귀양살이’라는 괄호가 덧씌워져, 알고 보면 내가 가지고 있던 자유라는 것이 한낱 허상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던 때였음에랴.

 

그 휴일 날, 그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거리를 방황하고 돌아온 나를 어느 낯선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청 구두공장을 시작하면서 사람을 필요로 했던 것을 알고 있던 재일교포 지인이 데려온 남자였다. 상대를 경계하던 그의 경직된 얼굴과 무언가 모를 절규 가득한 눈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외로운 내게 선물을 한아름 안고 온 허 선생

 

마이산에서 좌로부터 기자, 허 선생
마이산에서좌로부터 기자, 허 선생 ⓒ 우광환

“흑룡강 성에서 조선족학교 선생질을 했시요.”


말로만 듣던 북한식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처음 대하는 자리였지만, 나 역시 예의를 잃지 않으려 무진 노력했다. 마치 내가 무슨 인신매매꾼이라도 되는 양 그가 나를 너무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왠지 그의 실체는 내 눈에 선명히 보였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메마르도록 외로운 삶이 분명했던 그 시절의 내게, 뭔가 모를 한 아름 선물 보따리를 그가 들고 왔다는 것에 조금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그렇게 허 선생은 내게 다가왔다.

 

생활하는 내내 허 선생은 하루 종일 거의 말이 없었다. 음식은 맘에 드느냐, 혹시 불편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고 하면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몇 마디 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허 선생은 평소 그 어느 것도 아는 척을 하지 않다가 주위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문제를 안고 머리를 싸쥐고 있으면 그의 손길로 간단하게 해결 되는 일이 많았다.

 

"자넨 무인도에서도 공장 하나는 너끈히 지어낼 거야"


한번은 작업 중 컴퓨터 센서가 장착된 기계에 오류가 나서 작동이 멈추었을 때, 그런 기계를 접해보지 못했을 허 선생이 한참 들여다보더니 센서의 작동 원리를 알아내서 모두를 경악케 했다. 또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만져 댄 그의 손길에 여러 도구들이 편리하게 바뀌던가, 재창조되었다.

 

허 선생은 시간만 나면 무언가 뚝딱거렸는데, 그러다 보면 기계의 부품이나 작업에 필요한 도구들이 새롭고도 능률적으로 사용하기 좋도록 개량되어 나왔다. 그것은 평일이나 휴일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모습이었고 그는 항상 무언가를 연구했다.

 

“무인도에 혼자 데려다놔도 자넨 아마 그럴싸한 공장 하나 정도는 너끈히 지어낼 거야.”

 

내게 아무리 칭송을 받아도 그의 겸손한 마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았고, 어쩌다가 봉급을 좀 올려주려 해도 그를 어렵게 설득해야 할 판이었다.

 

어느 날, 자네가 없었으면 난 어쨌을까 모르겠다고 웃자 허 선생이 말했다.

 

“이런 구두 공장에서 기술자도 아니고 쓸모도 없는 저 같은 무지렁이를 받아주신 것만 해도 어딘데요. 감사는 제가 해야 할 말이죠.”

 

친구의 고향인 북만주를 방문하다

 

 허 선생 고향인 흑룡강성 화남현의 대선촌 마을 입구에서
허 선생 고향인 흑룡강성 화남현의 대선촌 마을 입구에서 ⓒ 우광환

세월이 흘러 결국 우리는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한국에서 다시 모였다.

 

다행이도 지금은 특별한 요리재주를 가진 부인까지 함께 와 생활하면서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순수했던 모습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정말 오래된 친구기에 이젠 각자의 생활과 고민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상의하게 된다. 지난 여름 그가 비자문제로 중국 고향엘 가 있을 때, 나 역시 소원이었던 그의 고향을 방문했다.

 

열흘간의 중국 여행에서 본 모든 것이 신기했고 그 경험 또한 허 선생 덕분이라는 걸 잘 안다. 그가 아니었다면 비행기에서 내린 심양에서도 침대열차를 타고 15시간동안 끝없는 벌판을 달려가야 하는 북만주의 쟈무스(佳牧社)까지 여행해볼 기회가 내게 과연 있었을까.

 

입구가 열리면 자동으로 작동되는 풍로가 장착되어 편리하게 석탄을 때긴 하지만 아직도 정겨운 아궁이를 사용하는 그 동네. 허 선생의 한국 친구라는 이유로 동네 여러 집에 돌아가면서 초대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아야 했던 소중한 기억 또한 잊지 못한다.

 

 허 선생의 고향집 앞 뜰에서
허 선생의 고향집 앞 뜰에서 ⓒ 우광환

 

허 선생 고마워

 

이제 그의 말투도 거의 한국식으로 바뀌었고, 생활 습관과 사고방식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 여전히 더 많은 도움을 주면서도 오히려 자신이 주위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다며 늘 고마워한다.

 

누구라도 자기를 대하는 상대까지 겸허하게 만드는 순백의 심성을 가진 허 선생. 거기에 무엇이든 두드리면 마술같이 필요한 도구가 창조되어 나오는 그의 손재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허 선생, 씨에씨에.


#중국에서 온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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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장편소설 (족장 세르멕, 상, 하 전 두권, 새움출판사)의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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