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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 오늘은 항주(항저우)에서 묵은 지 벌써 셋째 날이 된다. 그동안 묵었던 민박집을 떠나려니 조금은 서운하였다. 민박집 할머니네 네 살 된 손자가 귀여워서 답사가 끝나기만 하면 곧장 민박집으로 가자고 졸라대던 아들도 한 밤만 더 자고 가자고 한다. 그렇지만 여행자에게 영원한 숙식처는 없는 법. 살다 보면 언젠가 만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아득한 기약을 하고 짐을 챙겨 민박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오산광장. 오나라의 문화와 남송의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다고하는 이 광장은 1999년에 준공한 것으로 항주의 새로운 볼거리 중의 하나라고 한다. 우리는 곧바로 오산의 산길을 따라 20분 정도를 걸어서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 성황각으로 향했다. 성황각은 남송과 원대의 건축 양식을 본떠 만든 7층짜리 고건축물이다. 높이는 41.6m가 된다.

 항주의 오산에 위치해 있는 성황각.
항주의 오산에 위치해 있는 성황각. ⓒ 조영님


성황각의 1층에는 <남송항성풍정도(南宋杭城風情圖)>라는 대형 작품이 진열되어 있다. 이것은 남송 때의 생활 풍속, 이를테면 두다도(斗茶圖), 화랑출가(貨郞出街), 서호의 용주(龍舟) 경기 등이 모형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천여채의 가옥과 삼천 명이 넘는 인물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남송시대의 항주는 경제가 발달한 전국 최대의 도시 중의 하나였다. 특히 오산 일대가 더욱 그러하였다고 한다. 수공업이 매우 발달하여 그 당시에 화랑거(貨郞車)가 삼성교의 큰 나무 아래에 운집하였는데, 이 수레에는 실, 바늘, 일상용품, 어린이의 완구 등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갖추어 다녔다고 한다. 화랑출가(貨郞出街)라는 제목이 붙은 모형을 보니, 온갖 수공품을 수레에 싣고 가는 상인과 어린아이를 안고 상인을 맞이하는 오나라의 여인이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었다.

 온갖 수공품을 수레에 싣고 가는 상인의 모습이 재미있다.
온갖 수공품을 수레에 싣고 가는 상인의 모습이 재미있다. ⓒ 조영님


성황각의 2층에는 항주와 관계 있는 유명인사 28명을 새긴 조각도와 항주의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을 묘사한 조각상이 화려하면서도 웅장하게 전시되어 있다. 흔히 항주와 관련된 인물로 소식, 백거이, 악비 등을 거론하는데 여기 와 보니 이들 외에도 문천상(文天祥), 육유(陸游), 한세충(韓世忠), 범중엄(范仲淹), 두보(杜甫), 심괄(沈括) 등 많은 인물들이 있었다.

또 이곳에는 서호의 전설과 중국의 민간고사를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도 있다. 이 중에 '단교상회(斷橋相會)'라는 고사는 뇌봉탑에 전해 내려오는 <백사전>의 허선과 백사가 단교에서 서로 만나는 장면을 말한다. 그러고 보면 항주의 주된 테마는 서호와 그 서호에 전하는 <백사전>의 러브스토리가 아닐까 싶다. 항주를 떠나지 못해 오늘도 항주 거리를 서성이는 이유는, 머지않아 다시 항주를 찾고 싶어하는 마음도 항주의 낭만성 때문이지 싶다. 

성황각 옆에는 명나라 때의 관리였던 주신(周新)을 모신 성황묘가 있다. 주신은 이곳의 안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청렴결백하여 조금의 사심도 없었으며 소송을 원만하게 해결해 주어서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받았던 인물이다. 후에 주신이 명 성조에 의해 무고를 입어 피살되자 백성들의 원망을 잠재우기 위해 명 성조는 이곳 성황각에서 주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항주 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성황각은 번화한 시내에서 벗어난 오산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오고 가는 사람들도 많지 않아 한적하고 조용하였다. 무엇보다도 울창하게 잘 조성된 주위의 자연경관이 마음에 들었다. 아침저녁으로 산보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처럼 보였다.

성황각을 내려온 우리는 오산광장에서 서쪽으로 향하였다. 큼지막한 거리의 양쪽에 늘어선 상점을 한참 지나니 '청하방(淸河坊)'이라고 쓴 세 글자가 보였다. 이곳은 옛날 번화했던 남송시대 시장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거리이다. 차, 비단, 골동품, 각종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와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을 파는 가게가 운집해 있었다.

 청나라 때 시장의 모습을 재현한 '청하방'
청나라 때 시장의 모습을 재현한 '청하방' ⓒ 조영님


옷 가게에 들러서 조카들을 위해 중국의 전통 의상을 몇 벌 샀다. '치파오(旗袍)'라고 불리는 이 옷은 차이나 칼라에서 느껴지는 단정함과 정열적인 색상, 길게 이어진 치마의 옆트임에서 느껴지는 여성스러움이 있어 화려하고 매력적이다. 물론 한복의 화려함과 우아함과는 좀 다르지만 말이다. 요사이 나오는 개량 치파오는 평상복으로 입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들과 나는 중국의 전통 모자를 쓰고 거울을 보면서 킥킥거렸다. 어지간한 물건들은 중국의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것들이어서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다. 때로 조악하기 그지 없는 물건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래도 아기자기한 찻잔 두어 개 정도는 사고 싶었지만 가방을 줄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참아야 했다.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 중의 하나는 '정승고(定勝糕)'이다. 찹쌀에 팥 같은 소를 넣은 것으로 우리의 찹쌀떡하고 비슷한 음식이다. 모양도 맛도 특별하진 않다. 그래도 출출할 때 먹어서 그런지 허기는 면할 것 같았다. 이 음식에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북송 때에 양령공(楊令公)이 출정하자 백성들이 음식과 음료를 가지고 나와 군인들을 위로하였다. 군사들은 아주 특별한 맛이 나는 이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 다 먹고 나서 '이 음식의 이름이 뭡니까?'라고 하니 백성들이 '정승고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은 들은 군사들의 사기는 더하였다. 후에 이 떡을 먹은 군사들이 출전하는 싸움마다 백전백승하여 큰 전공을 세우게 되었다. 악비의 군대인 악가군(岳家軍)이 출전하였을 때에도 백성들이 이 떡을 군사들에게 주어서 가는 곳마다 승리하여 원근의 지방을 모두 진압할 수 있게 되었다."

 볼거리가 풍성한 청하방 가게
볼거리가 풍성한 청하방 가게 ⓒ 조영님


이와 같은 이야기의 전승으로 '정승고'는 항주의 전통적인 떡이 되었다고 한다. 또 황제가 점심으로 먹었다고 하는 '용수탕(龍須糖)'도 맛보았다. 용수탕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청나라 세종 황제가 문무백관을 청하여 연회를 베풀게 되었다. 황제가 마침 주방에서 과자를 만드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과자를 만드는 그 수법이 대단히 노련하여 마치 용과 봉황이 춤을 추는 듯하였다. 손 안의 실 같은 가느다란 것이 은처럼 하얗고,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수천 가닥이 마치 용의 수염 같았다. 그래서 황제는 크게 기뻐하면서 왕비와 신하들에게 내려 맛보게 하고 특별히 이 과자의 이름을 '용수탕'이라고 하였다."

 황제의 점심이라 불리는 '용수탕'을 만들어 팔고 있다.
황제의 점심이라 불리는 '용수탕'을 만들어 팔고 있다. ⓒ 조영님


그래서 이때부터 용수탕이 강남북 일대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어 천년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용의 수염처럼 가느다란 수천 가닥의 설탕 과자에 참깨, 땅콩, 잣 등과 같은 것들이 곁들여져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났다. 간식으로 먹기에 적당할 것 같았다.

이처럼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넘쳐 나는 청대의 옛 거리를 다리가 아프도록 활보하고서 우리는 낭만적인 곳으로 기억될 항주를 떠나서 다음 답사지역인 소주(蘇州)로 향했다.


#항주#정승고#청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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