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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3·1 운동 이전의 시점인 1917년, 당대의 신문 <매일신보>는 3천리 방방곡곡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 신문에 연재되는 이광수의 소설 <무정>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쯤 되는 당대의 독자들은 이광수가 펼치는 신식 연애담에 열광했다. 그래서 신문이 배달되는 시간이 되면, 동네 사람들이 마을의 정자나무 같은 데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광수의 소설 <무정> 낭독을 듣기 위해서였다. 천진한 독자들은 선남선녀의 연애담이 나올 때마다 침을 삼켜가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너나 없이 신식 연애에 대한 허황된 선망이 있었던 것이다.

 

이광수는 이런 독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영악한 작가는 소설의 아무 곳에나 연애담을 무시로 집어넣는다. 이형식과 김선형의 연애는 물론이고 이형식과 박영채의 연애담, 심지어는 자살하려는 박영채를 구하러 평양에 간 이형식으로 하여금 한 기생을 만나게 하고, 그녀와 대동강변을 거닐게 하여 둘 사이에 야릇한 연애 감정이 지펴지게 만들기도 한다.

 

이미 <무정>은 우리에게 유치하고 저속한 소설이라는 단계를 넘어서 있다. 유치와 저속은 시간이 지나면 괴기스러운 모습을 띠게 된다. 삼각관계라는 진지하고도 심각한 애정의 갈등을 '민족계몽과 새 시대 건설'이라는 뜬금없는 주제로 일약 승화시키는(?) 이 괴기스러운 소설은, 그래서 적잖이 퇴영적인 데다 은밀히 친일적이기까지 하다. 우리는 왜 이 소설이 일제에 의해 우대 받았으며 해방이 되고 나서도 과대평가되었는지를 헤아리는 것이 이롭다.

 

3·1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미명으로 일제의 탄압이 한층 교묘해지자, 식민지 언론들은 앞다투어 가며 선정적인 연애를 조장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지금 못지 않게 왜곡과 과장과 추측이 많이 있었다.

 

단발미인, 양장미인, 독살미인... 이젠 얼짱 강도?

 

일례로 당시 <동아일보>는, 생활고로 대동강에서 자살한 오산고보생 길삼식(23)에 대한 기사를 치정적인 연애가 배경인 양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식민지 신문에서 비일비재로 발견된다. 그 중 가장 극적인 것이 '독살미인 김정필 살인사건'이었다. 1925년 <시대일보>의 기사를 잠깐 들여다 보자.

 

"당년 스물이라는 꽃같은 미인이 자기 남편을 독살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사건이 작일에 경성복심법원으로 넘어왔는데, 그는 김정필(20)이라는 여자이다. 그는 금년 4월에 김호철(17)이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갔는데, 원래 품행이 단정치 못하여 시집 오기 전에 자기의 먼 친척뻘 되는 그 동네 김옥선과 수 차례 정을 통한 바가 있다.

 

그는 항상 자기 남편 김호철이 얼굴이 곱지 못하고 또 무식하다 하여 번민하던 중, 동네 청년들에게 '랏도링'이라는 무서운 쥐약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랏도링을 주먹밥과 엿에 섞어 놓고 남편에게 정답게 말했다. "그대의 위병과 임병을 고치려면 이 약을 먹으라. 이 약은 나의 5촌이 먹고 신효하게 나은 것이니 안심하고 먹어도 좋은 것이라" 하여 주먹밥을 먹였는데, 남편이 구역을 하며 토하자 다시 엿을 먹여 사망케 하였다." 

 

비단 <시대일보> 뿐 아니었다. <조선>과 <동아>를 비롯한 모든 신문들이 이 살인녀에게 난데없이 미인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그리고 신혼 초기의 살인이라는 점과 함께 결혼 전 친척과 통정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빼먹지 않았으며, 통정 상대역인 친척 남자의 이름까지 밝혔다.

 

당시 신문들은 젊은 여인의 성적 번민을 허구화하는가 하면 사진을 실을 때에도 가급적이면 요염하게 보이도록 화면을 만들었다. 신문마다 특집을 꾸며 '독살미인 김정필의 근황' 등과 같은 타이틀로 내보냈다.이런 식으로 식민지 신문들은 여자가 어떻게 생겼든지 간에 젊은 여자면 무조건 미인이라고 포장하였는데, 거기다가 단발이면 단발미인, 양장이면 양장미인이라고 호칭을 붙였다. 그러다 보니 '독살미인'이라는 칭호도 나온 것이었다.

 

이로부터 60년도 더 지난 대한민국에서는 비행기를 폭파했다는 한 여인이 검거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범인인지를 확신할 만한 어떠한 물적 증거도 없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신문들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생머리를 늘어뜨린 그녀의 사진을 큼지막이 실었으며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기도 했고 얼굴을 실제보다 더 희고 곱게 만들어 찍어 내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 식으로 이름하자면 '폭파미인'이라고나 할 수 있으려나?

 

또 그로부터 10년, 한국의 신문들은 새로운 미인을 만들어낸다.

 

"베이지색 상의에 살구빛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범인은 한눈에 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혜'라는 22세의 여인이 행인을 흉기로 위협하고 금품을 갈취하다가 체포된 것이었다. 그녀는 상습범이었다. 그런데 신문마다 '얼짱 강도'라고 이름붙여 대서특필했다. 이는 식민지 시대의 이름 '강도미인'이나 진배없는 호칭이다.

 

하지만 이런 보도가 나가자 강도미인에 대한 동정론이 일어 언론사 사이트에는 그녀를 옹호하는 댓글들이 올랐고 심지어 어떤 연예 기획사에서는 '그녀의 연예계 진출을 돕고 싶다'고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괴기스러운 현상은 이웃 나라 일본의 신문에까지 보도되었다.

 

최근 신정아씨 사건 신문 보도에 대하여 참으로 무성한 논의가 있었다. 우리는 이쯤 되면 여인의 누드를 실은 <문화일보>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울러 이런 보도 행태가 역사적으로 어디에서 비롯되어 이어지고 있는지를 헤아려 볼 수도 있다. 

 

이제는 조중동을 비롯한 다른 신문들이 <문화일보>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특히 <한겨레>의 비판이 가장 거세어 보인다. 일단 조중동은 문화일보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누드 사진 발견을 톱기사로 뽑아 놓고 이제 와서 비판한다면 그것은 너무 기회주의적이기 때문일 터이다. 그런데 조중동보다 더 실망을 안긴 신문은 뜻밖에도 <한겨레>였다.

 

"가까운 변~신, 온라인 0m, 오프라인 800m"

 

이렇게 유치하고 저속한 타이틀을 뽑아 보도했던 <한겨레>가 이제 와서 <문화일보>의 누드를 공격할 수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 <한겨레>의 타이틀은 유치하고 저속해서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데도 괴기스럽다. 아무튼 정작 괴로운 일은 조중동은 물론 <한겨레>까지 식민지 시대의 유산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사건의 현상을 통시적으로 보는 시각도 필요하다고 여겨 기사를 썼습니다.


#무정#독살미인#식민지유산#조중동#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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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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