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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에 의해 피랍된 인질들이 석방되고 귀국하면서 갖 가지 억측과 논란이 난무하고 있다. 귀국 회견장에서 그들 중 누군가가 "우린 잘못한 것이 없어 고개 숙이지마" 라고 외치는 보도를 보았다. 굳이 그들의 입장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지만 단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이 잘못한 것은 별로 없다. 적어도 기독교인인 내가 아는 한은 그렇다.

 

아프간 파병을 결정한 것은 우리 정부가 미국의 요청에 의해 결정한 것이고, 위험지역인 아프가니스탄에 봉사단(선교목적의) 파견을 결정한 것은 교회 측이었다. 거기에 봉사단으로 합류하여 피랍사태를 겪은 인질들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피살된 심상민씨의 아버지가 "내 아들은 신앙심이 그다지 깊지도 않았다" 며 정부과 교회를 상대로 이번 선교여행이 무리한 부분이 없었는지 법적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은 바로 봉사단에 참가한 사람들이 이번 선교를 가벼운 봉사활동 정도로 생각했다는 반증이다.

 

이교도의 내전지역에서의 봉사활동이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미리 알았다면 '그들 중 과연 몇 명이 봉사단에 지원했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이번 사태로 인해 가장 지탄받아야할 대상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 교회의 봉사나 선교여행은 자비부담을 원칙으로 한다. 물론 행사를 진행하는 예산은 교회가 책정하고 집행하지만 참가자가 납부하는 회비가 가장 큰 재원이 되며 부족한 부분을 교회의 예산으로 지원하는 것이 관례이다.

 

짐작컨데 이번 여행에 동참한 젊은이들은 밖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이번 봉사활동을 '기독교의 이슬람세계 침공'같은 심각한 사항으로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그들은 자비로 비용을 부담하면서 '난민들을 돕고 선교도 하겠다'는 아주 기특한 마음으로 카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것이다. 좋은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떠났다가 인질이 되어 생사의 기로를 헤매다가 겨우 목숨을 보존하고 나니 졸지에 죄인이 되어버린 봉사단원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우린 잘못한 게 없어" 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을 것 이다.


너무도 세속적인 한국의 대형교회들

 

하지만 이들과 달리 이슬람 지역에서의 선교를 기획하고 실행한 교회와 교계는 비난과 질타를 받아 마땅하다. 교회는 이슬람 세계의 기독교세계에 대한 피해의식을 공공연히 무시하며 선교를 강행해 왔으며, 선교(전도)하지 못하는 교인은 '열매가 없는 삶'이라며 선교를 통해 '열매 맺는 삶' 을 살으라고 강요한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포교는 중요하다. 선교행위가 없는 종교는 씨 없는 수박과 다를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교회가 교인을 상대로 '열매 맺는 삶을 살라'고 강조하는 당위성을 인정한다. 선교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존재는 없었을 것 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지역, 특히 내전지역에서의 기독교 선교가 당사자에게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아주 위험하고 별 실익도 없다'는 것은 지난 2004년 이라크에서 잔혹하게 피살당한 김선일씨의 경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교회는 아랑곳 하지 않고 위험지역에서의 선교를 강행한다. 왜일까?

 

지면상 자세히 말하지 않겠지만 기독교의 오지 선교는 '종말론'과 궤를 같이 한다. 오늘날 교회는 종말론을 설파함에 있어서 '예수의 재림이 땅 위의 모든 사람에게 믿음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져 누구도 최후의 심판에서 "복음을 듣지 못해서 믿지 못했다"고 핑계댈 수 없는 상황'을 전제조건으로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의 재림을 바라는 성도의 입장에서 '오지나 극지 혹은 위험지역의 선교'는 예수의 재림을 앞당기는 큰 공헌을 하는 것이며 가장 큰 칭찬 받을 일로 세뇌당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위상을 과시하자는 측면도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필두로 세계 10대 대형교회 대부분이 한국교회로 채워져 있는 현실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첨예하게 대립한 이라크와 아프간 등에서의 선교는 한국교회가 세계선교를 주도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좋은 기회가 될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해외선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면에는 위의 대외명분 외에 한국 교회의 구조적 문제도 큰 요인이 된다. 개신교를 이루는 많은 교단에서 운영하는 인가·비인가 신학교에서는 해마다 수 많은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대형 교회에서 전도사로 취업하거나 스스로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

 

교단에 소속된 대형교회들은 이들 중 일부분을 채용해야 체면도 서고 해당교회가 교단에서 큰 목소리도 낼 수 있다. 이렇게 취업한 전도사들은 박봉에 휴일과 밤낮 없이 '사명감' 하나로 고된 업무를 수행하지만 교회의 입장에서 이들의 수가 많아지고 호봉이 쌓이게 되면 고용에 대한 부담이 생긴다. 교회의 입장에서 그들의 인건비가 부담이 되면 당사자에게 넌즈시 '교회를 개척하거나 해외 선교를 떠날 것'을 권유한다. 물론 '개척자금을 지원해 주겠다'고 한다. 눈치가 빠른 젊은 성직자는 그것이 바로 해고 통보라는 사실을 안다.

 

이렇게 해서 젊은 성직자가 분가를 결정하게 되면 교회는 그 목회자를 위한 송별예배를 성대하게 치러준다. 송별예배에서 빠지지 않는 행사는 바로 특별헌금이다. 그날 예배를 통해 바쳐진 모든 헌금이 바로 해당 성직자의 전별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분가한 목회자들은 자신의 사명감과 생존을 위해 새 신자를 끌어들여 교회를 이끌어가야 한다.

 

교회에는 많은 종류의 헌금이 있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십일조에 대해서 교회는 '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강조 한다. 대한민국의 국민이 국가에 세금을 내듯이 십일조를 내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 밖에도 교회의 신축을 위한 건축헌금, 특별헌금, 성도 자신이 감사한 일이 생겼을 때 수시로 내는 감사헌금, 주일헌금 등 수 많은 명목으로 헌금을 내지만 특별한 목적으로 걷어진 헌금 (건축헌금, 송별헌금, 선교헌금 등)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 헌금은 목회자의 인건비와 교회 유지비 등으로 쓰여지고 그 중 극히 일부(교회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 교회가 두 항목을 합쳐 예산의 10%를 넘기는 교회는 거의 없다)가 선교비나 구제비로 지출 되는 것이 현실이다.

 

연간 수십억에서 수백억 혹은 그 이상을 예산으로 집행하는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교회의 위상에 걸맞는 해외선교 지원 실적이 필요하고 그것을 신도들에게 과시하는 데 있어서 액수보다는 건수가 중요하다. 따라서 파견된 선교사들이 어떤 고초를 겪든지 그들이 결국 목회를 포기하고 전업을 하던지 등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대형교회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백지 지도에 작은 교회의 이름을 하나라도 많이 새겨 넣고 "우리가 이렇게 해외 선교를 하고 있다"고 생색냄으로서 성도들의 주머니에서 보다 많은 감사헌금을 끌어내면 그로 족한 것 이다.

 

철부지 평신도들의 목숨을 팔아 부흥을 꾀하는 한국대형교회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아프간의 희생은 별일 아니다. 이번 사태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젊은 신도들에게 믿음을 재보기 위해 내리신 시험(temptation)'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인터넷한겨레,다음,더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프간인질#박은조#분당샘물교회#해외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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