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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산뜻한 향기로 열리고 있습니다.
가을이 산뜻한 향기로 열리고 있습니다. ⓒ 윤희경
계절의 순환이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달력을 들춰보니 어제(23일)가 여름 더위가 끝난다는 '처서(處暑)'입니다. 처서 때가 되면 모기의 입이 비뚤어져 맥을 못 추고 풀이 더 자라지 않는다 했습니다. 이제부터 찬바람 일어 모기와 파리가 사라지고 풀이 숨을 죽인다니 농사꾼에게 이보다 더 반가울 수는 없습니다.

산 속에서 느끼는 계절 감각이란 참 민감합니다. 어제저녁엔 열대야를 느끼며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새벽공기가 제법 서늘합니다. 그동안 차버렸던 홑이불을 끌어당기고 여름내 열어놓은 창문도 닫아 봅니다. 사람이 이리 간사스러운가 하고 밖을 나가보니 음력 칠월 열이틀 새벽 별들이 초롱초롱 매달려 반짝입니다.

다음 주 무 배추를 심으려고 밭고랑을 일구고 잡초를 예취기로 깎아봅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벌써 풀들이 매가리가 없어 보입니다. 처서에 비가 오면 흉년이 든다 했는데 지겹게 내리던 비도 그치고 맑은 햇살에 한낮 기온이 따끈하니 살 것만 같습니다. 흐물흐물 대던 고춧잎에 생기가 돋아나 팔랑거리고 진물러 터진 고추들도 온몸을 달궈내느라 뜨겁습니다.

긴 장마를 이겨낸 태양초 '앗뜨거' 손을 대면 데일듯 자신을 태워내고 있습니다.
긴 장마를 이겨낸 태양초 '앗뜨거' 손을 대면 데일듯 자신을 태워내고 있습니다. ⓒ 윤희경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더니 요즘은 좀 한가로운 기분입니다. 옛날 농부들이 그랬듯이 지금 한창 피어나는 벼 이삭들을 바라보며 '호미씻이' 흉내를 내며 한유와 느긋함을 맛봐야 할까 봅니다. 봄부터 여름내 고락을 같이 했던 호미, 삽, 괭이, 삼태기 등을 깨끗이 씻어 광에 걸어놓으니 저절로 기분이 가벼워 옵니다.

아직도 오후의 따가운 햇볕이 만만치 않습니다. 어정대다 산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조금 산을 오르자 오미자, 참당귀, 더덕과 곰취꽃들이 향기로 다가섭니다.

오미자는 언제 보아도 가을을 닮아가는 열매입니다. 새빨간 진주알들이 알알이 들어와 박혀 산속을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붉게 물들어가는 열매 속에선 꽃 향이 바람처럼 솟아오릅니다. 껍질의 신맛, 과육(속살)의 단맛, 맵고 쓴 씨, 짠맛을 동시에 품고 가을을 여는 이 열매는 사뭇 신비스러울 정도입니다.

여름이 넘어가는 처서, 오미자와 산머루가 빵빵하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여름이 넘어가는 처서, 오미자와 산머루가 빵빵하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 윤희경
오미자 둬 서너 알을 따 씹어 봅니다. 아직 덜 익어 그런지 새콤하고 쌉쌀한 맛이 입속을 돌아 나옵니다. 식은땀, 설사, 건망증, 불면증 등 자양강장제에 효험이 크다 했으니 조금 따다 찬물에 담가 여름내 지친 몸을 추슬러야 할까 봅니다.

산에서 가장 향기로 다가서는 꽃이 또 있습니다. 더덕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더덕은 '나 여기 있어요'하고 향을 풍겨댑니다. 꽃은 다 제 나름대로 향을 갖고 있지만 여름을 마감하는 이즈음에 더덕만큼 관능적인 향내를 품겨내는 식물을 난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종을 흔들 때마다 관능적인 향기를 뿜어내는 더덕꽃.
종을 흔들 때마다 관능적인 향기를 뿜어내는 더덕꽃. ⓒ 윤희경
오만하리만큼 관능적이게 중추신경을 자극하는 향을 따라가 보면 거기엔 꼭 더덕 꽃 피어나 자주색 종을 달랑대고 있습니다.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초록 잎사귀와 작은 종을 흔들어 발길을 잡습니다. 귀여운 종들 앞에서 땀도 훔쳐내고 가슴을 열어 심호흡을 하여 봅니다. 산을 오르며 쌓인 피로감이 종속에서 뿜어내는 향을 따라 멀리 날아가 버립니다.

'산에서 나는 고기'  더덕 뿌리를 사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산에서 나는 고기' 더덕 뿌리를 사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 윤희경
산속에서 온갖 풍상을 겪어낸 더덕 뿌리를 사삼(沙蔘)이라 하고, 거기서 나오는 진액 사포닌(saponin)은 코레스토롤을 예방하며, '산에서 나는 고기'라 하여 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물을 마시고 체한 덴 약이 없어도 더덕 즙 한 컵이면 시원하게 뚫린다 전해오고 있습니다.

가을 하늘을 향해 천국계단을 쌍아올리는 곰취꽃
가을 하늘을 향해 천국계단을 쌍아올리는 곰취꽃 ⓒ 윤희경
여름을 마감하는 가을 문턱에서 오미자와 더덕 꽃을 감상하고 향기에 취해 하산을 하는데 발목을 잡는 꽃이 또 있습니다. 곰취꽃과 참 당귀입니다. 노란 곰취 꽃 피어 가을을 재촉하고 참 당귀가 말을 걸어옵니다. '내년에도 꼭 돌아와 다시 만나요.'

그대는 당귀(當歸)
그대는 당귀(當歸) ⓒ 윤희경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꼭 기다릴께요. 자주색은 참당귀, 흰색은 개당귀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꼭 기다릴께요. 자주색은 참당귀, 흰색은 개당귀 ⓒ 윤희경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우측 상단 주소를 클릭하면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에서 고향과 시골을 사랑하는 많은 님들과 또 다른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오미자#더덕#당귀#곰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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