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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꽤 길어진 오후는 매우 조용하고 한가로운 듯 보였다. 허나 보이지 않는 곳의 움직임은 그 어느 곳보다도 부산하고 긴장된 시간의 연속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연무각 내에서의 절제된 기합소리는 내일이 보주의 회갑연임을 알게 해주는 유일한 증거였다.

문하생들이 참여해 보주의 회갑을 축하하는 군무(群舞)는 내일 보주 회갑연의 첫머리에 시작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운중보 미래의 주인을 위한 운중보의 잠재적인 힘을 천하에 알리는 계기도 될 터였다.

함곡은 간간이 들려오는 문하생들의 함성과 기합소리에 가끔 창밖을 내다보면서 깨알 같은 글씨로 몇 장의 쪽지에 쓰던 것을 마치고 돌돌 말았다. 풍철한이 보주에게 간다고 나간 뒤 작성한 것이었다. 그리고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숙고한 결과물이 바로 몇 장의 쪽지였다.

“……!”

오늘밤이 매우 중요했다. 상만천이 혈서를 손에 넣었다면 분명 추태감과 함께 움직일 터였다. 그리고 안 것이 아닌가 하는 움직임에 대한 보고도 있었다. 바로 용추가 한 시진 전 단독으로 추태감을 찾아간 일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숙고한 결과는 오늘밤에 분명 그들은 움직일 것이었다. 아니 지금 바로 움직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시간이 없었다. 자신을 믿고 혈서를 쓴 모든 사람들을 보호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어쩌면 잘 되었는지 몰랐다. 그동안 그들이 움직였으면 하는 바람과 또한 움직일 수밖에 없게 유도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이 이제 자신을 완벽하게 파악했다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금 불편은 하겠지만 어차피 한 번은 정면으로 부닥쳐야 할 일이었다.

함곡은 돌돌 말은 몇 장의 쪽지를 집어 들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가 옆 나무 벽에는 산수(山水)를 그린 족자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그것을 옆으로 밀고는 약간 튀어나 보이는 옹이를 조심스레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떼어냈다.

손가락 하나 정도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나타나자 그는 돌돌 말은 쪽지 몇 장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옹이를 조심스레 밀어 넣고 족자를 원래대로 해놓았다. 이제 누군가가 저 쪽지를 가지고 은밀하게 움직여 연락을 취할 것이었다.

그는 걸음을 옮겨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에 번지는 노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상큼한 바람도 지나가고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운중보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어둠이 내리면 이 아름다운 곳은 피가 흐르고 시신이 쌓여갈 것이다. 끔찍한 환영이 함곡의 뇌리 속을 오고가고 있었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갑자기 무슨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는지 자신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다급성을 흘려냈다. 얼굴 역시 당황스런 표정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삼합회…! 낭패로군…. 거기를 잊고 있었다니….”

아마 자신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한 인물들의 안위에 대한 생각에 골몰했던 것 때문일 것이다. 또한 상대들은 이미 극도로 조심하며 최대한 경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이 어려워진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가장 많은 정보를 주었던 혈서 속의 한 인물이 어젯밤 이후로 중요 정보를 빠뜨리고 전해오지 않고 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것 또한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하여간 상만천과 추태감이 혈서를 손에 넣었든 아니든 간에 그들이 움직인다면 가장 먼저 손을 볼 곳이 바로 삼합회였다. 동상이몽을 하고 있어도 지금 운중보에 들어와 있는 세력 중 그들에게 공통되는 적은 바로 삼합회였다. 더구나 오늘 숭무지례에서 인후가 남궁정에게 두 쪽이 나지 않았던가? 자신이 용추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도 가장 먼저 손쓸 곳은 바로 삼합회였다.

자신은 물론 용추 같은 사람들은 불확실한 변수를 극도로 싫어하는 버릇이 있다. 불확실한 변수는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전체의 일을 망가뜨릴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미 삼합회는 좌등의 편을 들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또한 삼합회는 함곡에게도 매우 필요한 변수였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상만천을 다소나마 견제할 유일한 세력이다. 그들이 상만천과 추태감에 의해 쉽게 제거된다면 그만큼 용추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자신들의 피해가 커질 우려가 있다. 삼합회에 경고를 해주어야 한다.

“정말 문제로군….”

허나 지금으로서는 경고를 할 뾰쪽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덜컥 ‘위험하니 대비하시오’라고 전갈을 보내는 것도 안 될 말이다. 그는 잠시 생각 끝에 자신이 가기로 결정했다. 지금 시기에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풍철한이 돌아와 주면 좋으련만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는 밖을 향해 다소 높은 억양으로 불렀다.

“선화… 있느냐?”

허나 함곡은 여동생이 대답하기 전에 다시 말했다.

“아니다… 되었다.”

생각을 바꾸었다. 지금 자신이 움직인다면 혈서 속의 인물들은 자신의 움직임에 매우 당황해 할 것이다. 그것이 삼합회를 잃는 것보다 더 큰 손해를 보는 일이었다. 그저 삼합회가 스스로 이 위기를 벗어나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삼비(三妃) 중 염비(艶妃)는 유독 허리가 가는 여자였다. 풍만한 가슴과 둔부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그녀의 허리는 정말 한 줌 밖에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허리만큼 손목이나 발목도 가늘었고, 무림에 몸 담은 여자답지 않게 그녀는 전족(纏足)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가 걷는 모습은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작은 발로 풍만한 둔부를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은 너무나 불안하여 금방이라도 주저앉거나 쓰러질 것 같았지만 사내들이 본다면 성욕을 자극하는 걸음걸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걷다가 넘어지거나 쓰러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돌부리에 걸려도 쓰러지지 않는 여자였고, 아주 작은 발로도 남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경공에 능숙한 여자였다.

“……?”

그녀는 귀비의 방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없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두 어디를 간 것일까? 점심은 모두 같이 했었다. 그리고 어젯밤 움직인 탓에 잠이 부족해 낮잠에 빠져들었는데 깨 보니 아무런 기척이 없는 것이다.

“문주님의 방에 모여 있나…?”

점심을 들면서 궁단령 문주는 어쩌면 오후에 회의를 해야 할지 모른다는 말을 비치기도 했다. 자신이 잠에 곤히 빠진 것을 보고 깨지 말라고 한 것일까? 헌데 이상한 것은 시비들마저 전혀 기척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곧 바로 궁단령의 거처로 뒤뚱거리며 향했다.

회랑을 가로질러 궁단령의 방으로 다가갔지만 헌데 역시 기척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문주님… 소비이옵니다.”

그녀는 안을 향해 간드러진 목소리를 발했다. 허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도대체 자신이 곤히 자고 있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다들 나갔던 것일까? 그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을 열고는 들어섰다.

밝은 곳에서 들어온 사람이 어두운 방안을 금방 한 눈에 보기란 쉽지 않다. 또한 볼 것도 없이 방안은 비어 있었다. 헌데 이상할 정도로 섬뜩한 느낌과 함께 기분이 나빠졌다.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전면을 보다가 갑자기 몸을 홱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시야에 들어오는 끔찍한 광경에 난생 처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렀다.

“악----!”

비명을 지른다고는 했지만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신음과도 같이 극히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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