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그 때였다. 밖에서 자신을 안내해 주었던 시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풍철한 대협께서 뵙고자 오셨습니다.”

보주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풍철한의 방문이 의외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모시거라.”

보주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며 풍철한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찾아뵙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풍철한으로서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자, 정중히 포권과 함께 예를 취했지만 결국에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와있는 설중행을 본 탓이었다. 숭무지례가 끝난 후 곧바로 매송헌으로 갔던 이 자식이 어떻게 여기는 와있는 것일까? 더구나 보주와 마주앉아 식사라니….

“식사는 하셨나?”

“예… 막 마치고 오는 길입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설중행에게 가있다.

“네 녀석은 여기에 웬일이야?”

결국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설중행이 다시 교자 하나를 입에 넣고는 우적우적 씹었다.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소?”

설중행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풍철한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 괜한 호기심의 발작으로 우연히 만난 그의 부상을 치료해 주었다. 그때 만해도 이렇듯 복잡한 사연을 가진 자식이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설중행이 운중보와 관계가 있는 놈이라는 사실을 진즉에 알았다면 누가 때려죽인다 해도 데리고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터였다.

더구나 이 자식은 처음 만났을 때에는 세상물정 모르는 촌뜨기처럼 보이더니 겨우 사흘 만에 자신에게 대들 정도가 되었다. 하기야 함곡이 용봉쌍비를 맡긴 놈이니 자신에게 대들지 말라는 법도 없다.

“소문이 사실인가…?”

풍철한이 설중행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묘한 시선으로 보주와 설중행을 번갈아 보고는 중얼거렸다. 그것은 불쑥 지껄인 혼잣말 같았지만 두 사람에게 들으라고 의도한 것임이 분명했다. 보주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 무슨 소문을 말하는 겐가?”

풍철한의 혼잣말을 그냥 무시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허나 보주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풍철한이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풍철한은 잠시 망설였다.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을 보고 심중의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불쑥 내뱉었지만 막상 하려니 꺼림칙한 것이다.

“두 사람이 부자지간(父子之間)이라는 소문 말입니다.”

그래도 할 말은 참지 못하는 풍철한이니 결국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내뱉었다.

“그래…?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가?”

보주는 여전히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을 떠올리며 묻는 것도 아니고, 또한 대답하는 것도 아닌 어투로 말했다. 마치 말했던 풍철한을 놀리는 듯한 모습도 섞여 있는 듯 했다.

“그래도 빙빙 돌려서 물었던 저 녀석보다는 역시 자네가 훨씬 솔직하군.”

풍철한은 힐끗 옆에 앉아있는 설중을 보고는 되물었다.

“아닙니까?”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이야. 자네는 소문 중에서 사실로 확인된 것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아마 서호에 돌을 던져 잉어를 잡을 확률만큼 될까?”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보주의 말을 조금 음미해보면 그것은 부정도 긍정도 아니었다. 서호에 돌을 던져 잉어를 잡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재차 따져 묻기도 다소 거북했다.

이미 보주의 말 속에 설중행이 먼저 물었다고 했으나 설중행 역시 대답을 확실하게 듣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만약 자식이라면, 그리고 자식이 묻는다면 말해줄 법도 하련만 대답하지 않은 것을 자신이 묻는다고 확실하게 대답해 줄 리도 만무했다.

“그런 소문을 알아보기 위해 노부에게 온 것은 아닐 테고… 어쩐 일로 찾아오신 겐가?”

사람을 찾아오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더구나 보주 같은 인물을 그냥 문안인사차 들렀다고 대충 말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한 풍철한이었다. 풍철한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보주께서 저를 왜 부르셨는지 여쭈어 보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그저 저 녀석을 제 눈에 띠게 하면 제 성격상 저 녀석을 이곳으로 데리고 올 것이라는 예상까지 하시고 저를 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말 어떻게 보면 엉뚱한 발상이었다.

“……?”

보주도 어이가 없는지 잠시 풍철한을 바라보다가 실소를 흘렸다.

“허허헛… 자네는 노부가 세상사를 다 알고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신(神) 쯤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구먼. 노부가 자네를 부른 이유는 친구인 철담의 죽음을 조사해 달라고 한 것이 아닌가?”

풍철한의 말도 엉뚱한 것이었지만 그 대답은 너무나 천편일률적인 것이어서 풍철한의 오기를 발동시키기에 족했다.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부른 것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상황으로 보면 대들고 있는 입장이었다. 보주가 잠시 풍철한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순순히 물러날 기세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는지 고개를 끄떡였다. 또한 더 이상 부인만 할 필요는 없었다. 상황을 보아 먼저 말을 해주었어야 했는데 어쩌면 늦은 감이 있기도 했다.

“확실히 눈치는 빠른 친구로군. 직감이란 것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지.”

보주의 태도로 보아 풍철한을 부른 이유는 단지 철담의 죽음을 조사시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의외로 순순하게 시인한 셈이었다.

“……!”

풍철한은 물론 설중행도 기대를 가지고 보주를 응시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노부는 한 가지 자네에게 귀찮고 부담되는 일을 맡길 생각이었네. 물론 자네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노부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을 처리하는 데는 자네가 적격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싶지 않네.”

“부담되는 일이라 하오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풍철한이 약간은 긴장한 듯한 기색을 보이며 물었다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는 금방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농을 던지듯 다시 물었다.

“이 녀석이라도 맡아달라는 것입니까?”

“내가 뭐 어린애요?”

풍철한의 말이 설중행이 툴툴거렸다. 농담이 분명했지만 자신을 가지고 어린애 취급을 하는 풍철한에게 불만스럽다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설중행으로서는 풍철한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언제 자기가 형제가 되자고 한 적이 있나? 중원사괴 중 하나가 되겠다고 한 적이 있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