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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나중에 아미와 등을 돌리게 될지라도 어쩔 수 없다. 아니 이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고, 또한 자하진인이 직접 화산칠검 중 네 명과 매봉검 황용을 대동하고 들어 온 몇 가지 목적 중의 하나였다. 또한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패라고 생각했다.

“잠시 참아주시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은데…. 사태의 솔직한 답변이 필요하고, 또한 본 파의 안위를 위해서도 이런 몰염치한 짓을 하게 된 것이오.”

회운사태의 혈도를 제압한 이유를 밝힌 셈이다. 이유는 두 가지. 회운사태에게 물어볼 말이 있고, 또한 회운사태를 자파 안위를 위해 써먹겠다는 것이다. 몰염치라는 완곡한 표현을 썼지만 무림의 모리배(謀利輩)라 하더라도 부끄러운 짓임에는 틀림없다.

더구나 산공독이라니…. 정파라 자처하는 화산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나게 되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될 터였다.

“사태를 둘러싼 소문들이 많더군요.”

곤욕스러워하는 자하진인을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였는지 모르지만 황용이 나섰다. 그녀는 회운사태에게 매우 가까이 붙어 앉아서 뭔가 알아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황시주는 매우 고약한 사람이군요. 어찌 이런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짓을 할 수가 있소이까?”

“사태께서 어떠한 욕을 하든 받아들이겠어요. 다만 나는 알고 싶은 것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람이라 이보다 더 심한 짓을 할지 몰라요.”

이것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짓을 할지 모른다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황용의 눈에는 자신의 말이 절대 허튼 것이 아니라는 표정을 내뿜고 있었다. 회운사태는 화산파의 사람들을 보기조차 싫다는 듯 눈을 감았다.

“오래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라는 것쯤은 우리도 알고 있어요. 더 이상의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도 짧게 끝내야겠군요.”

황용 역시 마음은 편치 않은 듯 나직하게 탄식을 불어냈다. 회운사태가 눈을 감고 대답을 아예 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았다. 만약 반대 입장이 되었더라면 자신은 저런 정도가 아닌 마구 욕설을 퍼부었을 터였다.

“설중행이란 청년이 보주의 아들이 맞는가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라 뒤로 물러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회운사태는 대답이 없었다. 황용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 질문에도 회운사태는 미동도 없다. 눈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만약 회운사태가 눈을 뜨고 있었다면 미세한 동요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설마 설중행이란 청년을 모른다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더 자세히 말씀해 드려야 시인을 하실 셈인가요? 어릴 적 아미에서 자랐고, 아미(峨嵋)의 절학인 구전환영보(九轉幻影步)도 익숙하게 시전 한다더군요. 더구나 어렸을 적에 아미는 제자도 아닌 그 청년을 추천해 이 운중보에 입보시킬 정도였으니까요.”

화산 역시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자 회운사태도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지 눈을 떴다.

“그렇다고 내가 어찌 그 아이가 보주의 자식인지 알 수 있으리오?”

황용은 회운사태가 입을 열자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의 험악한 꼴은 황용 역시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더 이상의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회운사태를 죽여야 한다.

“분명히 알고 계실 것이에요. 그 청년의 어릴 적 일은 아미만이 알고 있을 테니까요. 더구나….”

황용은 고의로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는 입을 회운사태의 귓가로 가져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 청년을 낳은 사람이 사태가 아닌가요?”

그 말에 회운사태의 얼굴에 당혹스런 기색과 함께 노기가 떠올랐다.

“황시주…! 말조심하시오. 어찌 출가한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이오?”

회운사태의 노화가 진정 극에 달한 듯 축처진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점혈이 되어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떡 일어나 황용의 따귀라도 갈겼을 터였다. 허나 황용은 위축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아닌가요? 아닐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십칠 년 전 운중보주는 화산도 들렀고, 아미도 들렀어요. 그가 화산에 와서 한 짓이 무언지 아시나요?”

황용 역시 목소리가 뾰쪽해지며 앙칼진 목소리를 발했다. 탁자 위에 놓여진 그녀의 손이 떨림에 따라 찻잔이 흔들리며 경쾌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꽃다운 처녀에게 몸을 바치라고 한 것이었죠. 자신의 자식을 낳아달라고…. 그 처녀를 바친 덕에 화산은 비교적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보낼 수 있었으니까요.”

말을 하면서 그녀는 힐끗 자하진인과 화산칠검 중 네 명을 바라보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황용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보주의 아이를 잉태할 수 있었죠. 또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유산을 했고요.”

“아미타불……!”

회운사태가 나직하게 불호를 외었다.

“모른 척 하지 말아요. 보주가 아미에 갔을 때 사태와 그런 일이 없었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어요? 사태가 아니라면 다른 제자와 그런 일이 없으리라 장담할 수 있나요?”

회운사태 역시 노기가 치솟아 있는 상태였고, 속세를 떠난 몸이었지만 같은 여자로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아미타불…. 없었소…. 아미에서는 그 어떠한 일도 없었음을 확언하겠소.”

“그런데 어찌하여 그 아이를 운중보에 입보시켰단 말인가요? 삼년에 한 번…. 그것도 자파의 제자를 한 명이라도 더 입보시키지 못해 안달이 난 상황에서 그 아이를 추천할 수 어찌 추천할 수 있었지요?”

“그것은 그 아이의 부친이 본 파의 화부였고, 나무를 하다가 변을 당한 터라….”

황용의 앙칼진 목소리가 회운사태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그런 허울 좋은 변명은 하지 않으시게 좋겠군요. 아무리 인정이 넘치는 아미라 해도 기껏 화부의 자식에게 그런 기회를 줄 수 있단 말인가요?”

“아미타불….”

회운사태는 불호를 외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말을 해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황용도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깨달았는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부처님을 모시는 분이니…. 사태께서는 부처님 앞에서 맹서하실 수 있나요?”

회운사태는 망연히 황용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 아미타불….”

단호한 어조였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말을 섞기 싫다는 완강한 태도였는데 오히려 황용이 당황할 정도였다.

“그 청년과… 사태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인가요? 보주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냐고요…?”

“……!”

허나 이미 때가 늦었다. 화운사태의 이미 한 번 감겨진 눈은 다시 떠지지 않았고,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황용이 악을 쓰듯 물어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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