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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말 서울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열린 윈도비스타 체험관 행사.
ⓒ 오마이뉴스 남소연

한 잡지사 편집기자에게 일방적으로 전해 받은 '디지털 시대를 사는 아날로그 시인의 단상'이라는 제목이 일견 그럴 듯 했다. "선생님은 아날로그 식으로 살고 계신 것으로 아는데 맞죠?"라고 기자가 물었을 때도 나는 "그렇죠"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을 했다.

과학적 상식이 턱없이 부족한 나로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를 적확하게 설명할 재간은 없지만 내 나이 쉰 고개를 넘은 지도 한참이요, 내 자신 아날로그형 인간임을 추호도 의심해본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과연 내가 아날로그 시인인지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이 불쑥 들었다. 어떤 불길한 기억 하나가 낯선 방문객처럼 나를 찾아오고 난 뒤의 일이었다.

컴퓨터로 시 쓰는 '아날로그 시인'

2005년 10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민주노동당 강기갑·권영길·천영세 의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아래] 2005년 9월 1일 오후 정기국회 개회식이 끝난 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에 새로 설치된 컴퓨터 사용법을 배우자, 이인영 의원이 "제가 선배님들의 컴맹탈출을 찍어드리겠습니다"며 폰카로 사진을 찍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나는 시를 쓰고 있었다. 요새도 연필을 깎아 종이 위에 싸륵싸륵 시를 쓰는 시인들도 있다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러니 시를 쓰고 있었다기보다는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고 해야 옳겠지만 그 정도로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까탈을 부릴 마음은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전원이 나갔는지 갑자기 화면이 검게 지워져버렸고, 뒤이어 내 머릿속까지 암전상태가 되고 말았다. 다행히도 불과 서너 줄을 쓰다 말았으니 사라져버린 시구들을 기억해내기 위해 안달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오랫동안 손맛을 보지 못하다가 입질을 해온 터라 느닷없는 정전사태가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나는 전원이 다시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문득, 컴퓨터가 아닌 종이에도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자판을 두드려 시를 쓰기 시작한 칠팔 년 안팎의 세월을 제외하고는 까까머리 중학생시절부터 무려 삼사십년 동안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시를 써왔으면서도 그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니!

더 충격적인 일은 컴퓨터 앞에서는 제법 잘 풀리던 시상이 정작 종이 앞에서는 맥을 못추고 시들해지고 만 것이었다. 결국은 단 한 줄의 시구도 건지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하다가 전원이 들어온 뒤에야 배시시 시상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런 치명적인 고백을 하고서도 글을 써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가 순수한 아날로그 시인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해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디지털 시인인가? 그럴 수도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소속한 문학카페에 접속하여 회원들이 올린 작품을 읽고 댓글을 달기도 한다. 나 또한 그곳에 시나 글을 올리며 가상공간에서의 문학적 소통을 즐기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내가 가르치는 학교 아이들과 주고받는 문자나 메일의 양도 만만치가 않다. 여학생 담임을 맡았던 재작년인가는 저녁을 들기가 무섭게 컴퓨터 앞에 앉아 반 아이들과 메일을 주고받으며 수다를 떨거나 인생 상담을 해주는 일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도 했었다. 생일을 맞은 아이들에게 생일 축하시를 써주는 대신 적어도 다섯 차례 이상은 담임인 나와 메일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규칙 같은 것을 정해놓았던 것이다.

꽃 편지지에 잉크로 쓴 편지, 우체통에 넣으면 '털썩' 소리가

사정이 이런데도 나 자신을 아날로그형 인간이라고 우기고 싶은 이유가 뭘까? 그것은 혹시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어떤 향수나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내공이 약한 별수 없는 위인이다 보니 현대문명의 이기에 어쩔 수 없이 기대어 산다고 해도 옛것을 반추하고 그리워하는 마음마저 못쓰게 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하나. 편지에 대한 향수만 해도 그렇다.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 한 통 보내는 것이 얼마나 가슴 조이는 일이었던가.

문방구에 갓 사온 꽃 편지지에 파란 모나미 잉크로 정성스레 편지를 쓰고,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려 수신인의 주소와 이름이 적힌 편지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이고 풀로 봉투를 봉한 뒤에 동네 어귀까지 걸어가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집어넣으면 우체통 바닥으로 편지가 '털썩'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곤 했었다.

요즘이야 하루에도 몇 번씩 문자나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편지를 보내놓고 적어도 사나흘은 지나서야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애틋한 기다림의 시간들로 인해 사랑은 또 얼마나 깊어졌던가. 긴 겨울이 지나고서야 새 봄이 오듯이 그 긴 기다림의 시간들을 어렵사리 통과하면서 우리는 성급하지 않는 자연의 성품을 닮아 갈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시절 음악에 대한 목마름은 또 어땠는가. 요즘은 '엠피쓰리'라 불리는 손가락만한 크기에 복제능력이 탁월한 마술 같은 기계가 등장하여 자기가 원하는 노래를 무한정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을 통해서나 듣고 싶은 노래를 겨우 접할 수가 있었다.

그래도 졸음을 참아가며 기다린 덕분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신청곡을 사연과 함께 듣고 있노라면 얼마나 마음이 달뜨고 행복했던가. 그 가난했던 시절, 빈곤 속의 풍요를 음악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는 요즘 아이들이 알기나 할까.

▲ 지리산 장터목산장에도 '우체통'은 있다.
ⓒ 박상규
나도 제자의 습작시를 읽고 싶다

둘.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이었다. 시인이신 담임선생님은 작문시간에 시를 한 편씩 써보라고 하셨다. 나는 마음이 가는대로 한 편의 시를 써냈고, 시를 완성하여 제출한 열 명 남짓한 급우들 중에서도 유독 선생님의 칭찬을 독차지했다. 아마도 그 때부터 나는 문학 지망생으로서의 꿈을 키워갔던 것이리라.

바로 그 무렵, 나는 천변을 배회하다가 진달래를 파는 할머니를 자주 만났다. 천변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신라 사람처럼 생긴 아줌마 아저씨들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약을 팔고 있었다. 재수가 좋은 날은 얼굴이 하얀 누나들의 예쁜 몸매도 구경할 수가 있었다.

그 때가 사춘기였을까? 곡마단에서 도망 나왔다는 가슴이 봉긋한 누나들이 가끔 내 꿈 속에 나타났던 것을 보면.

내 고향 동천
어쩌다 장터가 돼버린 천변에서
진달래를 팔던 할머니는
언제나 졸고 계셨다

귀가 없는 알루미늄 양푼에
가득 담긴 꽃잎들이
알싸한 거품을 머금고
요절해가고 있는 동안

천변 아랫장
곡마단에서 도망 나왔다는 누나는
구리뱀처럼 몸을 꼬아 묘기를 보이며
슬쩍 젖가슴도 보여 주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시인이셨던 담임선생님은
어느 날 국어시간
내 습작시를 보시고는
슬프게 슬프게 나를 바라보시더니
뜨겁게 손 쥐어 주셨다

지금 기억에 곡마단 누나와 결혼하여
진달래 할머니와 함께 살고 싶다는
그런 얼빠진 시였을 게다

아, 그리고 슬픈 세상 따뜻한 이웃이 되라는
그런 묵시의 교훈이었을 게다
그때 선생님의 눈빛은. -자작시, '그때 선생님의 눈빛은'


나는 정말 누나(혹은 누나들)와 결혼하여 진달래 할머니와 살고 싶었을까? 아마도 그랬으리라. 그런 은밀한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겁도 없이 시로 쓴 것을 보면.

어쨌거나 그때 시인이셨던 담임선생님은 내 습작시를 보시고는 손을 뜨겁게 잡아주셨는데, 지금 나는 슬프게도 뜨겁게 손잡아줄 제자가 없다. 삼사 년째 내게 습작시를 가지고 온 제자가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디지털 시대에 사는 아날로그 시인의 비애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코를 빠치고 있을 일만은 아니다.

요즘도 나는 '가을수업'이라는 것을 한다. 문득 가을이다 싶은 날이면 교실에 들어가 가을수업을 선포하고 모두 책을 덮게 한다. 그 시간에는 내가 들려주는 음악을 들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혼자서 조용히 하는 일은 무엇이라도 용납이 된다. 때로는 아이들에게 하얀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주고 거기에 무언가를 적게 한다. 학교 뒷산에서 주어온 낙엽을 한 장씩 나누어주며 아이들의 영혼을 향해 이렇게 속삭이기도 한다.

"동산에서 예쁜 낙엽을 주우면서 좀 덜 예쁜 낙엽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예쁘고 안 예쁘고 그 기준이 무얼까? 여기 이 낙엽을 보세요.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잖아요. 그럼 이것은 안 예쁜 낙엽인가요? 이 구멍을 통해 이렇게 여러분을 바라볼 수도 있고 세상을 볼 수도 있는데요. 그리고 이 구멍은 벌레들이 먹은 흔적일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이 이파리는 벌레들에게 좋은 먹이가 되어준 거잖아요. 그럼 참 마음이 예쁜 낙엽 아닌가요?"

디지털 시대의 아이들이라고 영상이 아닌 실물로 만나는 낙엽을 낯설어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낙엽 한 장에도 소스라치며 몰려드는 것을 보면 아직 감수성이 죽지 않았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벌레 먹은 구멍에도 아이들의 정겨운 눈길이 가 닿는다.

물론 선생인 내가 미리 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하다. 한 걸음 앞서 일러준다는 거. 그러면 모든 것이 사뭇 달라진다. 어쩌면 그것이 디지털 시대를 사는 아날로그 시인의 몫인지도 모른다.

빠름의 편리함도 인정해주고 싶다

셋. 욱현이라는 아이가 있다. 지난 중간고사 때 교실에서 녀석을 만났다. 나는 시험 감독을 하고 있었고, 그는 시험 종료 시간을 불과 오 분 남짓 남겨놓고 OMR카드에 정답을 옮겨적고 있었다.

녀석은 유난히 동작이 느렸다. 아니 그 정도로는 표현이 부족하다. 그는 정답을 옮겨 적는다기보다는 한 칸 한 칸 정답을 조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나 또한 머릿속에서 시어 몇 개를 조각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시험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무실로 달려가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위] 학교 정원에 떨어져있는 낙엽들.
[아래] 낙엽전을 겸한 가을 수업에 아이들이 남긴 작품들.
ⓒ 안준철
욱현이는 좀 느린 아이다.
평소에는 그다지 굼뜨지 않지만
시험 기간에는
녀석의 느린 동작이 도드라진다.

그는 흡사 조각가 같다.
OMR 카드에 서른 문항의 정답을
컴퓨터용 싸인 펜으로 옮겨 적는데
오 분 남짓 걸린다.

서른 개의 빈방마다
한참씩이나 고요한 눈길을 주다가
아뿔싸, 실수를 했는지
정답 카드를 한 장 더 달라고 했다.

또 오 분을 기다리기가 무료해서
시간이 없다고 다그쳐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의 평화로운 눈빛이
다시금, 한 장의 카드가 아닌
서른 개의 빈방에 가 닿고 있었다.

욱현이를 볼 때마다
나는 나의 속도를 반성한다. -자작시, '나의 속도를 반성하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는 아마도 속도와 편리함의 차이리라. 경쟁과 효율의 신화창조에만 열을 올리는 사회분위기에 편승하여 나도 모르게 속도를 내다보면 그 사이 하얗게 지워지는 아이들이 있다. 마치 고속도로변의 들풀처럼. 그것이 내 반성의 이유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왜 나는 속도를 반성하는 시를 쓸 때조차 종이에 시를 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컴퓨터를 켜고 말았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미 내 몸에 깊이 스며버린 편리함을 쫓는 관성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아날로그 시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을 품어야하나?

그보다도 나는 화해를 도모하고 싶다. 가끔 아이들과도 화해의 악수를 나누는 것처럼. 그리고 느림의 미덕이 존중되어야하듯 빠름의 편리함도 인정해주고 싶다. 이 글도 결국에는 디지털시대의 산물인 전자우편으로 보내야 하지 않은가. 아니다. 마감이 한 이틀 남았으니 산책삼아 우체국까지 걸어가 등기우편으로 부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럼 그래볼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문제가 있다. 괜히 등기우편 값을 무는 것도 그렇지만, 원고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보내면 잡지사 편집자들로 아날로그 방식으로 다시 타자를 쳐야하지 않나?

아무래도 평소대로 보내는 것이 낫겠다. 형식이야 디지털이라도 내용이 아날로그면 되지 않겠는가. 가끔 멀리 객지에 있는 아들에게 휴대폰 문자로 보내는 사랑의 언어처럼.

아들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키운 것 같다

▲ 휴대폰 문자 보내기.
ⓒ 오마이뉴스 권우성
넷. 아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아들아이의 휴대폰 전화번호를 몰랐다. 언젠가 아내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고 세상에 그럴 수가 있냐고 나를 나무랐지만, 난 솔직히 아내의 휴대폰 전화번호도 모른다. 아내에게 꾸지람을 먹지 않으려고 외워보려고 애써보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마찬가지다. 물론 그 이유는 단축번호 때문이다. 집은 1번, 아내는 2번, 아들은 3번. 편리함이 가져온 부작용이랄까?

나는 지금 대학교 졸업반인 아들 녀석과 추억이 참 많다. 우리는 주로 냇가나 언덕배기 같은 곳에서 함께 놀았다. 그 곳에는 토끼풀이 유난히 많아서 아들 녀석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면 아이의 열 손가락과 두 개의 팔목, 심지어는 목덜미와 이마에 이르기까지 온통 시계꽃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해질 때까지 신나게 뛰놀다가 어둑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가 삶아놓은 고구마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아들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키운 것 같다. 비록 지금은 단축번호로 불러내어 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주고받는 등 디지털 방식으로 소통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여기서 아날로그 방식이란 자연과의 접촉을 말한다. 흙에서 자란 꽃을 달고, 흙에서 캔 고구마를 먹고 자란 것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아들에게 가장 많이 준 선물은 시간이었다. 시간은 자연의 어머니다.

아, 그리고 우주의 기적인 이 초록별에서 우리가 사랑을 나눌 시간도 '잠깐 사이'다. 짧은 시 한 편을 끝으로 글을 접는다. 아날로그적으로.

아들 녀석과 풀밭에서 놀다가
언덕배기 꽃그늘에 잠깐 숨었다
잠깐이었다, 아주 잠깐
아들 녀석 애처로운 눈에
눈물 고인 것도
내 가슴 저미어
고개 내민 것도. -자작시, '잠깐 사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 PC 사랑 > 7월호에도 기고하였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날로그#디지털#자작시#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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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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