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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등의 말에 남궁정은 씨익 웃었다.

“지금이라도 술잔을 주신다면 받겠습니다.”

말은 그러했지만 남궁정은 좌등에게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이만 물러가겠다는 뜻. 좌등 역시 예를 받자 남궁정은 자신이 원래 있었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슴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어느덧 다리를 타고 흘렀는지 그가 걸을 때마다 바닥에는 피로 물든 발자국이 찍혀졌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도 지혈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

모든 시선이 괴이한 남궁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모르지만 남궁정의 시선이 상만천에게로 향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일그러진 상만천의 시선과 잠시 마주쳤는데 남궁정의 의미모를 미소와 함께 대조적으로 상만천의 입가에는 찐득한 살기가 묻어 나왔다.

‘저 놈이디!’

바로 저 놈일 것이다. 저놈의 검이 일접의 미간과 목줄기를 뚫어버리는 환영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그동안 일접을 죽일 인물을 아무리 떠올리려 했지만 결정적인 인물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헌데 눈앞에 펼쳐진 남궁정의 검을 보니 일접은 분명 저 자에게 당했다.

‘왜…?’

저 자가 무슨 이유로 일접을 죽인 것일까? 일접은 흑백쌍용과 오위가 떠난 직후에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그렇다면 일접은 우연히 지나치다 저자와 만난 것이 아니다. 저놈은 일접을 노리고 있다가 흑백쌍용과 오위가 떠나자 일접을 살해한 것이다. ‘돌발’적이나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것이다.

‘삼합회…?’

잊고 있었다. 삼합회는 중원 상계의 열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다. 허나 지금까지 자신과 부닥친 적이 없었다. 아니 삼합회는 스스로 자신에게 양보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삼합회에 대해 경계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저 자가 일접을 죽였다면 그것은 삼합회가 자신에게 도전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전포고와 다름없다. 게다가 남궁정이란 애송이의 눈빛은 목적이 자신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인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면 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했다. 더구나 좌등의 말대로 아주 위험한 검을 익히고 있음을 알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자신을 나타내고 싶어 안달을 하는 것이 젊은 것들의 어리석음이었다.

만약 저런 놈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면, 그리고 아무런 경계심 없이 운중보에서 우연하게 마주치는 경우에 저 놈이 불시에 기습했더라면 저 놈의 위험한 검을 피할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저 놈이 나선 것은 자신을 지켜주려는 하늘의 돌보심이었다.

‘사갈 같은 년…! 잠시 방심했구나….’

그동안 숨죽이며 자신과 부닥치지 않으려 했던 것이 결정적인 기회를 노리고 있었음일까? 상만천의 시선이 슬쩍 삼합회의 회주인 궁단령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시선은 돌아와 자리에 앉는 남궁정에게 쏠려 있었는데 그녀 역시 왜 남궁정이 갑자기 나섰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지혈을 시켜야겠어요.”

궁수유가 남궁정에게 몸을 돌리며 손을 뻗으려하자 남궁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소. 혼자서도 할 수 있소.”

남궁정은 옷자락을 찢어 뭉치더니 상처 난 가슴 부위에 가져다 대고 꾹 눌렀다. 이어 몇 군데 혈도를 막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궁수유와 궁단령 모녀를 바라보았다. 아마 안심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확실히 남궁정은 강한 사내였다.

“아무런 이의가 없으므로 금일 숭무지례는 모두 끝내기로 하겠습니다.”

장내에 약간 목청을 높인 장문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문위의 모습으로 보아 더 이상 다른 상황이 이어질 기회를 주지 않고 서둘러 끝내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더 이상 시끄러워지면 곤란했다.

“이왕 시작된 비무라면 소제에게도 기회를 주시겠소?”

우려하던 일이 바로 자신의 사제인 옥기룡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정중히 장문위에게 포권을 취하고는 걸어 나오고 있었는데 그의 시선은 함곡 일행에 섞여 있는 능효봉과 설중행에게 가 있었다.

장문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남궁정의 지독스런 검에 이미 살벌한 죽음의 장이 되어 버렸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을 하게 된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며 비무를 계속하게 한다면 이 자리는 아예 자신의 감정을 해소시키는 공인된 도살장이 되어 버릴 터였다.

“그만… 돌아가거라. 이미 숭무지례는 끝났고, 네가 좌총관 어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몰라도 다른 사람과의 비무는 할 수 없다.”

옥기룡은 장문위의 단호한 말에 걸음을 멈췄다. 사형은 지금껏 자신에게 저렇게 단호한 어조로 행동을 제지시키는 적이 없었다. 언제나 자신의 행동에 대해 넌지시 동조해주던 사형이었다.

“사형… 이왕지사….”

“쓸데없는 소리. 돌아가라니까….”

억양이 올라가며 더욱 단호한 목소리였다. 자신이 나선 것에 대해 매우 심기가 불편한 듯 보였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사형에게 대들 수는 없는 일. 옥기룡은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일단은 가볍게 예를 표하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장문위는 옥기룡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시선을 천정으로 돌렸다. 사방에 걸려있는 촛불은 거의 타들어갔지만 아직 꺼지지는 않고 있었다. 장문위의 신형이 지체 없이 허공을 갈랐고, 그는 촛불을 붙이는 동작과 마찬가지로 사방의 촛불을 모두 껐다. 동시에 손짓을 하자 사방의 문이 일제히 열렸다.

“이제 모두 처소로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사방의 붉은 천은 그대로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만약 촛불이 모두 타버리고 붉은 천이 내려왔다면 이 안에서 어떠한 일이 발생했을지 모르는 일. 붉은 천이 아래로 내려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누구에게 다행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시신을 수습하도록….”

추태감이 천과에게 말하며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은 활화산의 용암처럼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담담한 목소리였다. 아직까지 남궁정을 노려보고 있는 천과와 지공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셋이 한 몸처럼 지내오길 벌써 이십년이 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죽었음은 곧 자신들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

허나 그들은 이빨을 지그시 씹으며 예를 갖췄다. 더 이상 참는다는 것이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웠지만 그들은 참았다. 교두들의 눈에서도 실망과 분노가 교차되고 있었지만 그 분노는 천과와 지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추태감이 한 걸음 떼며 상만천을 바라보았다. 딱딱하게 굳어진 상만천의 표정은 치솟는 분노를 애써 참고 있는 듯 했다. 그런 감정이야 자신과 다를 바 없다. 허나 지금은 참아야 할 때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려주기 위해서는 참아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제 운중보 안의 상황이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상만천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에서 결판낼 명분이나 이유가 없다. 이제 용추가 만든 생사부에 따라 제거하면 된다. 힐끗 주위를 돌아본 상만천이 추태감의 곁으로 다가서며 걸음을 옮겼다.

“두 어르신께서도 수고하셨습니다.”

장문위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성곤과 중의 두 사람에게 다가와 예를 올렸다.

“우리가 수고한 것이 무에 있는가? 자네가 아주 훌륭히 일을 처리했구먼…. 수고했네.”

성곤이 아직까지 식지 않은 두 구의 시신을 보며 마음이 개운치 않다는 듯 근심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또 벌써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때 귀산노인과 우슬 일행도 벌써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우슬이 가는 방향은 문 쪽이 아니라 바로 함곡 일행이 있는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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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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