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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좌등은 광나한과의 대결로 많이 지쳐있는 상황이다. 그 사실은 이곳에 있는 인물들이라면 누구나 눈치 채고 있다. 삼재 역시 그것을 놓칠 리 없다. 그렇다고 좌등의 성격으로 다른 시간을 정해 비무에 응할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일.

좌등이 미소를 지으며 이 비무에 대한 부당함을 말하려던 장문위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는 다른 말 할 것 없이 장문위가 주관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다.

"이 비무는…."

장문위가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그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한쪽 구석에서 나직하지만 냉소적인 음성이 장내에 흘렀다.

"개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리오."

삼합회가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지금까지 그 어떠한 돌발적인 상황에서도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적이 없었던 남궁가의 사내가 발한 음성이었다. 궁수유 옆에 앉아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것을 본 삼합회주 궁단령의 얼굴에 잠시 의혹이 떠올랐다가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허나 사내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는 것을 본 궁단령은 말릴 수 없음을 알고는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적신창께서는 소생의 부탁을 들어 주실는지…. 소생은 남궁가의 남궁정(南宮晸)이라는 무명소졸입니다."

좌중의 시선이 처음부터 눈에 거슬렸던 사내에게로 일제히 쏠렸다. 잘생겨 보이지만 냉소적인 표정과 음울한 기질이 보는 이의 가슴에 서늘한 느낌을 주는 사내. 남궁정은 정중하게 좌등에게 포권을 취해 예를 올렸다. 좌등은 갑작스럽게 남궁정이 등장하자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예를 받았다.

"남궁공자셨구려… 부탁이 뭔지 몰라도 지금 먼저 들어온 선약이 있는 터라 나중에 말씀하시면 안 되겠소?"

남궁가가 지금은 삼합회에 소속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무림세가로는 수백 년의 전통이 있는 곳. 남궁세가를 무시할 인물은 중원에 거의 없다.

"바로 그 문제 때문입니다. 소생은 지금껏 무적신창 어른을 흠모하고 있었던 터. 오늘 실로 어른의 모습을 보며 더욱 존경스런 마음이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여 소생은 어른께서 허락하신다면 어른을 대신해 감히 어른의 면전에서 얼쩡거리는 사람과 손속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길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궁단령은 더욱 놀라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남궁정은 저런 인물이 아니다. 말을 저토록 오래 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또한 진실로 누군가를 존경하는 시선을 보내는 것도 보지 못했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몸에서 태어나 자신의 자식임을 인정하지 않는 부친은 물론 그래도 남궁가의 핏줄이라고 인정하고 그에게 길을 열어준 할아버지에게도 보이지 않던 눈빛이었다. 정말 남궁정은 무적신창을 존경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신 비무에 나가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생각해 보았소?"

좌등의 눈이 남궁정의 전신을 훑은 후에 한 말이었다.

"물론입니다. 하찮은 소생의 목숨이 어찌 아깝겠습니까? 다만 만에 하나 좌어른의 위명에 먹칠을 함은 물론 뜻하시는 바를 잃을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자신을 믿어주었으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 간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통성명 역시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진 것. 허나 비무에 대신 나선다는 것은 그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좌등이 져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좌등은 자신을 애절하게 바라보는 남궁정의 눈을 바라보았다. 음울한 기운이 들어있으되 깊고 순수하다. 적어도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거짓이 없다. 허나 능력은 있는 것인가? 정말 자신이 있어 나선 것일까? 인후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자신과 버금갈 정도의 인물이다. 진기가 고갈된 지금 상태에서는 자신도 이길 것이라 장담할 수 없는 상대다. 그런 인물을 저 남궁가의 청년이 당해낼 수 있을까?

"상대가 인정한다면…."

뜻밖이었다. 좌등은 웃었다. 왠지 저 사내를 믿고 싶었다. 그 결과가 어찌 되더라도 자신을 존경해왔다는 남궁가의 사내를 믿고 싶었다.

"승패의 결과에 대해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인후가 확인하듯 좌등을 보고 물었다. 지쳤다고는 하나 좌등은 거목이다. 지금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치명적인 수법이 두 가지 있었다. 시간을 끌며 좌등을 더욱 지치게 만든 다음 사용할 생각이었다.

헌데 갑자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젊은 놈이 나타났고, 좌등을 대신해 자신과 싸우겠다고 하지를 않나…. 또한 좌등까지도 자신만 허락한다면 대신 내세우겠다고 하지 않는가? 좌등을 없앨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까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내가 비무에 나선 것과 똑 같을 것이오."

좌등은 고개를 끄떡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또한 너무나 황당한 일이었다. 좌등의 말에 남궁정은 천천히 선이 그어진 안으로 걸어 들어왔는데 그의 입가에는 아주 밝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마 태어나서 저렇게 해맑은 미소를 짓기는 처음일 것 같았다. 그것은 자신을 처음으로 믿어준 좌등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좌등 역시 마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정말로 너를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좌등은 남궁정의 어깨를 한 번 툭 두드려주고는 망설임 없이 선 밖으로 나섰다.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오히려 당황스러워진 쪽은 장문위였다. 단 한 번의 숭무지례로 끝나기를 바랐고, 또한 인후가 나서자 그것을 중지시키려 했다. 동의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나서더라도 말이다. 헌데 남궁정이라는 인물이 나서는 바람에 묘한 상황에 빠져 버렸다.

더구나 어쩔 수없이 이 비무 역시 자신이 주관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는 슬쩍 천정에 매달아 놓은 황촉을 바라보았다. 아직 이할 정도는 남아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말린다고 말려질 것은 아닐 터.

"두 분 어른께서도 역시 입회인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장문위는 중의와 성곤을 향해 예를 올리며 물었다. 그 질문의 속뜻은 이 비무를 인정하겠느냐는 것. 중의와 성곤의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들이 거부를 하고 비무를 중지시키면 여하튼 비무는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허나 중의는 먼저 고개를 끄떡였고, 성곤 역시 마지못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떡이자 장문위는 인후와 남궁정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모든 조건은 조금 전과 같소. 내가 선 밖으로 나가는 그 순간부터 비무는 시작될 것이오."

말과 함께 장문위가 두 사람을 바라보자 두 사람은 가볍게 포권을 취해 주관자에 대한 예를 보였다. 두 사람의 의사를 확인한 장문위가 선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어린놈이 겁이 없구나…."

인후가 비웃음과 함께 말을 던졌다. 젊은 것들은 조그만 자극에도 참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충동적이 된다. 무인에게 있어 감정에 휩쓸린다는 것은 곧 패배와 직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나 인후가 남궁정을 자극하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또 있었다. 알려지지 않는 인물은 무섭다. 판단을 잘못하고 젊은 혈기로 뛰어나왔다고 보기에는 왠지 꺼림칙하다. 그렇다면 상대를 자극해 먼저 움직이게 만들면서 상대를 파악한 후에 승부를 보는 것이 현명하다.

"당신은 비무를 입으로 하시오?"

남궁정은 본래부터 약간은 뒤틀려있는 사람이다. 올바르게 말을 하려해도 자칫 상대에게는 냉소적이나 비웃는 것으로 들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정말 비웃는 말이 나오자 오히려 화가 치미는 것은 인후였다.

"아주 막되어 먹은 후레자식이로군."

꿈틀… 남궁정의 짙은 검미가 꿈틀거렸다. 입술 끝이 묘하게 비틀어지고 있었다. 남궁정이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바로 '후레자식'이라는 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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