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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아버지가 궁에 들지 않고 천막살이를 하고 있으니 창덕궁에 있는 것이 가시방석이었다. 꾸물대었다가는 아버지가 왕도를 떠나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 아버지가 왕도를 벗어나는 것은 이방원에게는 악몽이다. 아버지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불효의 시작이다. 아버지를 붙들어 두기 위해서는 궁실을 짓는 일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창덕궁 동북쪽 오늘날의 창경궁에 태상전 공사를 착공했다. 충청도와 강원도 장정 3천명을 동원하여 벼락치기로 밀어붙였다. 창덕궁을 짓느라 전국에 쓸 만한 목재가 바닥이 났다고 사간원에서 공사 중지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묵살했다. 속전속결. 공사 시작 3개월 만에 궁실을 완공하고 덕수궁이라 명명했다.

덕수궁은 오늘날의 서울 정동에 있는 덕수궁하고는 격이 다르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을 피해 의주로 몽진 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창덕궁과 경복궁이 불타버리고 들어갈 곳이 없었다. 임금이 들어가 살만한 곳을 찾아봤으나 성종의 형님 월산대군이 거처하던 사저 이외에는 변변한 집이 없었다. 사저를 보수하여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부른 것이 오늘날의 덕수궁이다.

부동산 부정 분양사건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한양천도가 완료되었다. 창덕궁에서 국사를 살피고 아버지를 덕수궁으로 모셨으니 태종 이방원은 마음이 편안했다. 이제는 태평성대를 열어가는 숙제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사전 정지 작업과 오랜 준비기간을 거치지 않고 한양천도를 결행하다보니 부작용이 속출했다. 개경에서 이주해오는 관료들의 주거 문제였다.

우사간대부( 윤사영이 상소를 올렸다.

"군자감승 박희종이 세자의 힘을 빌어 부당하게 집터를 분양받고자 했으니 파직하소서. 세자의 좌정자는 세자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스승임에도 불구하고 박희종이 세자의 좌정자로 있을 때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세자를 이용하려 들었고 아래로는 사풍을 더럽혔으니 법대로 죄를 물으소서."

오늘날의 부정 분양사건이다. 예나 지금이나 부동산에는 관리들의 부정이 끼어들었나보다. 태종 이방원은 박희종을 즉각 파직했다. 이러한 사건을 보더라도 당시 관리들의 주거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삼부의 수장과 정승들에게는 나라에서 집을 마련해주거나 집 지을 터를 분양해주었는데 중하급 관리들의 주거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니 부정이 횡횡하고 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개경에서 내려온 관리들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백성들의 집을 빼앗거나 헐값에 사들이니 백성들의 불만이 터질 듯 했다.

강제 이주민의 동태가 수상하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태종 이방원은 창덕궁 주변에 있는 백성들의 집과 땅을 접수했다. 분양 물량을 늘기기 위해서다. 무상 몰수가 아닌 유상 수용이다. 오늘날의 수용령과 흡사하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백성들은 경기도 양주 대동리 한골에 집단 이주시켰다. 한골은 현재의 광진구 구의동이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이주민들이 집단 거주하는 한골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한골에는 창덕궁 공사로 철거되어 먼저 이주해온 백성들도 많았다. 대대로 살아오던 집을 몇 푼의 돈을 받고 떠나왔지만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냥 두면 이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할 것이라 예견한 태종 이방원은 정치력을 발휘했다.

견주 산하에 있던 양주를 도호부로 승격하고 관아와 향교를 한골로 이전했다. 동대문 밖 숭신방과 안암골은 물론 도봉과 노원 그리고 고양·교하·임진·적성·포천·가평현을 산하에 두고 있는 양주 도호부는 당시 도읍지 주변에서 제일 큰 도호부였다. 살고지들과 녹양들을 조성하여 강제 이주민들로 하여금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위성도시로 육성했다.

1970년대 초 개발독재를 밀어붙이던 박정희 정부는 이렇게 하지 않았다. 정부는 산동네 판자촌과 청계천변에 무허가 판자집을 짓고 살아가던 기층민들을 강제 철거하여 경기도 광주 산등성이에 한 가구당 8~20평씩의 땅을 나누어주며 '죽든지 살든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짐짝 부리듯이 내려놓았다.

도로와 상·하수도 등 기반시설이 없는 환경은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했다. 공중화장실은 30분 이상 기다려야 했고 급한 사람은 대책이 없었다. 생업의 터전을 서울에 두고 온 철거민들은 매일같이 살인적인 교통전쟁을 치러야 했다. 살길이 막막한 5만여 주민들은 71년 8월 폭동을 일으켰다. 이른바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광주 대단지는 오늘날의 성남시다.

부패한 불교를 척결하라

▲ 회암사지. 무학대사가 주지로 있던 회암사에 태조 이성계는 궁실을 별도로 짓고 상주하다시피 했다. 권력과 밀착했던 사찰은 조선 중기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았던 보우가 주지로 있을 때까지 번창했으나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소실되어 폐사되었다. 흙속에 파묻혀 있던 회암사지는 발굴되어 오늘날 계단석과 주춧돌만 잡초에 묻혀 있다.
ⓒ 이정근
강제 이주민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한 태종 이방원에게 고민이 다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등극 이후 끈질기게 따라붙는 하늘의 조화(造化)였다. 오늘날의 과학으로 해석하면 기상재해이지만 그 당시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으면 임금의 부덕이라 인식했다. 왕은 근신했으며 신하들은 자책감에 사직했다.

갑인년과 무진년의 가뭄은 살인적이었다. 서운관을 총동원하여 24시간 하늘을 관찰했지만 햇무리가 지고 달이 태미성 우액 북문으로 들어갔다는 그 당시 최첨단 천문관측 보고는 올라왔지만 비가 왜 안 오는지, 언제쯤 올 것인지에 대한 보고는 없었다. 하늘을 향하여 비를 내려 달라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금주령을 내리고 먹는 음식 가짓수를 줄인 임금이 종묘사직과 명산대천에 기우제를 지내고 소격전에서 초제를 지냈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하늘이 노여움을 풀어주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뙤약볕에 들판이 타들어가면 임금의 가슴은 재가 된다. 이렇게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데 승려들이 받쳐주지 못했다.

조선은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하는 유교국가다. 고려의 패망 원인을 불교에서 찾았던 정도전은 억불숭유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했다. 4대문 안의 사찰을 폐쇄하고 승려들의 도성 출입마저 금지했던 정도전이 물러나고 급변하는 정변의 와중에서 억불정책이 느슨해진 틈을 이용하여 승려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태조 이성계가 하나 밖에 없는 말벗 무학대사를 찾아 회암사를 드나들고 신덕왕후 강씨를 위한 대장불사를 일으키기 위하여 흥천사에 드나드는 것이 사찰에는 바람막이가 되고 승려들에게는 좋은 빌미가 됐다. 그러나 이보다 승려들이 기승을 부리게 된 더 큰 이유는 강력한 제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좌정승 하륜이 발 벗고 나섰다. 불교를 손봐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이념에 배치되는 불교가 풍속과 사회기강을 저해하는 행위는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심은 태종 이방원과 하륜이 이심전심이라기보다는 하륜이 임금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금산사 주지 도징이 그 절의 종 강장과 강덕을 강간하고 와룡사 주지 설연이 그 절 종 가이를 간통했다. 이에 깜짝 놀란 조정은 부녀자들의 사찰출입을 제한했지만 부녀자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것을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사간원에서 칼을 빼어들었다.

#회암사#이방원#이성계#태강전#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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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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