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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에 한 아이가 교무실을 찾아왔습니다. 그 아이의 손에는 아주 작게 접은 쪽지가 하나 들려 있었습니다. 쪽지의 주인도 아주 작은 아이입니다. 몸집도 작은 편이지만 행동거지나 말소리가 유난히 작게 느껴지는 아이입니다.

출석을 부를 때마다 저는 그 아이 곁으로 바짝 다가가야 합니다. 멀리서 보면 입만 달싹일 뿐 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 때문이지요.

출석을 부르는 것이 그저 출석 여부를 점검하는 절차라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매번 이름으로 출석을 부를 때마다 이런 대화가 오가기 때문에 귀를 바짝 세워놓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김○○."
"I love you!"
"I love you, too!"


아이의 말소리가 왜 그리 작고 부자연스러운지 그 이유를 저는 잘 모릅니다. 어릴 적에 질병을 앓았거나 사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무실 책상에 앉았다가 뭔가 기척이 느껴져서 뒤를 돌아보니 그 아이가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손에 든 쪽지를 저에게 건넬 때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무슨 일이 있니?"

그 아이가 교무실까지 찾아와 저에게 쪽지를 건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니와,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저에게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불쑥 든 것이지요. 저는 아이가 보는 앞에서 쪽지 내용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했습니다. 드디어 쪽지에 깨알같이 적힌 아이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영어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저 김○○이에요. 선생님께 고마워서 편지 쓰는 거예요.'

여기까지 읽고 저는 일단 안도의 숨을 내 쉬었습니다. 무엇이 고마웠을까? 저는 그것이 몹시 궁금해서 아이를 세워둔 채 얼른 편지를 읽어 나갔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영어 단어를 안 외워서 점수가 낮았는데, 고등학교 올라와서 선생님을 뵈었을 때, 보는데 순간 남달랐어요. 영어 단어도 눈에 들어오고 영어 단어 조금씩 알게 되었어요. 영어가 이해도 돼서 중간고사 때 점수가 중학교 점수보다 훨씬 뛰어넘었어요. 선생님 감사해요. 영어가 좋아졌어요.'

저는 거기까지 읽고는 편지를 다 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아이의 등을 토닥여 보내고 난 뒤에야 중요한 문구가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 오늘 생일이에요.'

저는 백 미터 단거리 선수처럼 교무실을 뛰쳐나가 불과 10초가 채 못 되어 아이의 교실에 닿았습니다. 손에 아무것도 든 것이 없어서 더욱 마음을 다해 아이의 생일을 축하해주었습니다. 저는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잠깐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한순간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습니다. 아이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지금 아이의 영어 공책 맨 첫 장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선생님의 약속>
친절한 교사가 되겠습니다!

<나의 약속>
나 자신을 사랑하겠습니다!


학기초 첫 수업시간에 아이들 앞에서 친절교사 서약을 하고 그 내용을 공책에 적게 한 것입니다. 언제든지 제가 약속을 어기면 공책을 들이밀며 따지라는 말도 잊지 않았지요. 대신, 아이들도 저와 한 약속을 꼭 지켜야만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런 상황에 처할 수도 있으니까요.

"선생님이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는 약속 잘 지키고 있어 안 지키고 있어?"
"잘 지키고 계세요."
"그럼 너도 너 자신을 사랑하겠다는 약속 잘 지키고 있겠지?"
"…."

#약속#제자#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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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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