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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다음날 출근길이었다. 깨끗하고 하얀 반소매 하복 차림의 여학생들 중에서도 유난히 얼굴 표정이 환해 보이는 두 아이가 얼른 눈에 띄었다. 가만 보니 그들은 누군가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누군가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두 아이가 내 턱 밑까지 와서 아는 채를 하고난 뒤의 일이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 너희들이었구나.”
“선생님하고 한 약속 지키려고 빨리 왔어요. 저희들 잘했지요?”
“그래. 참 잘했다. 그런데 네 친구 둘이 또 있잖아.”
“아, 걔들은 저희들 보다 먼저 갔어요.”

불과 사나흘 전만 해도 얼굴도 모르고 지내던 아이들이었다. 그들과 인연이 닿은 것은 학교 수련회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들과 수련회를 함께 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수련회에 가지 못하는 잔류 학생들의 임시 담임을 내가 맡은 것이었다.

학년부장으로부터 전해 받은 명단은 모두 여덟 명이었다. 그 중 네 명은 모종의 사고를 저질러 학생부에서 지도를 받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수련회를 떠나던 날, 나는 명단에 적힌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강당으로 갔다가 뜻밖의 사태를 만났다. 지도중인 네 아이 모두 무거운 여행 가방을 질질 끌고 나타나 제발 수련회를 가게 해달라고 제 담임 소매를 붙들고 애걸복걸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수련회에 가면 선생님 짐은 제가 들고 다닐 게요. 아니, 선생님 엎고 다닐게요. 정말에요. 절대 말썽 한 피우고 잘 할 거예요. 제발 수련회에 가게 해주세요.”

담임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표정이 어찌나 절박하고 애처로운지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그 아이를 바라보는 담임의 눈빛도 안타깝고 애처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몰래 차에 탑승하여 수련회 현장까지 따라가는 대담함을 보이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 다음 날, 두 아이가 학교에 나타났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학교 복지실로 갔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눈빛이 유순해보였다. 잠시 후, 우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돈 버는 거 말고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있니?”
“돈 버는 것은 왜 안 되는데요?”
“하하. 그런 말이 아니고… 그럼 돈은 벌고 싶어?”
“그럼요. 돈 많이 벌어서 잘 살고 싶어요.”

돈 이야기를 잘 꺼냈다 싶게 두 아이 모두 돈에 대한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들의 돈에 대한 상상력을 테스트해볼 차례였다.

“너희들 말이야. 한 달에 300억씩 벌게 된다면 그것으로 뭐할래?”
“예? 300억요?”
“그래. 월급으로 매달 300억을 받는 거야. 그럼 무지 좋겠지?”
“좋지요. 그 돈으로 옷도 사고 집도 사고 여행도 하고…”
“좋아. 그럼 다음 달에 또 300억을 받으면 그것으로 뭐할래?”

“또 옷 사고 집 사고 여행도 하고…”
“좋아. 1년이면 3600억을 벌 테니까 그 돈이면 평생 입을 옷도 사고 집고 사고 여행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럼, 그 다음 달에 번 300억으로는 뭐 할래?”
“땅 사요.”
“땅은 뭐 하러 사. 돈이 매달 300억씩이나 생기는데.”

2분쯤 흘렀을까? 두 아이 모두 거듭되는 질문에 차츰 말문이 막히고 있었다. 그렇게 갖고 싶었던 돈인데 막상 돈을 쓸데가 없다니! 아이들은 그 사실이 모두지 믿어지지가 않는지 죄 없는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이제 내 차례가 되었다.

“난 말이야. 300억이 생기면 우선 우리 학교에 근사한 학생회관을 하나 만들고 싶어. 운동을 하고 나면 샤워도 할 수 있도록 해놓고, 동아리방도 여러 개 예쁘게 꾸려서 너희들 클럽활동도 거기서 하고 말이야. 순천만 해도 학교가 수십 개가 되니까 몇 년 동안 번 돈은 학생회관을 만드는데 쓸 거야.”

두 아이는 뭔가 수수께끼가 풀린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잠시 표정이 흔들리듯 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럼 선생님에게 남는 것은 하나도 없잖아요. 선생님을 위해서도 돈을 쓰셔야죠.”
“그래? 그럼 한 달 월급은 사모님에게 갖다 주지 뭐. 300억이면 평생을 쓰고도 남을 돈이잖아? 그런데 애들아, 300억이면 천 원짜리 빵을 몇 개나 살 수 있을까?”
그것이 산수 문제인 줄 알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두 아이에게 나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묻고 싶을 거야. 학생회관을 지어주면 학생들은 좋지만 선생님에게 남는 것이 뭐냐고 말이야. 그럼 나도 너희들에게 물어볼게. 300억 어치 빵을 사서 배터지게 혼자 먹는 것이 행복할까? 아니면 가난한 아프리카나 아시아 어린이들 하고 함께 나눠 먹는 것이 더 행복할까?”

“혼자 배터지게 먹는 것보다 아프리카 아이들과 함께 먹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아요.”
“정말 그럴 것 같니? 그건 말이야, 너도 모르는 예쁜 마음이 네 안에 있기 때문이야. 너희들 오늘 참 예쁘다.”

그 다음 날은 대화의 마당에 두 아이가 더 늘었다. 먼저 나온 두 아이가 학교를 가지 않겠다는 남은 두 아이를 설득하여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날 나는 임시담임으로서 마지막 종례를 이렇게 갈무리했다.

“내일 휴일 잘 보내고 모레는 학교에 일찍 나와. 너희 담임선생님 참 좋은 분이야. 지금 너희들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프실 거야. 선생님을 감동시켜드려. 그러면 다른 선생님들도 너희들은 달리 보실 거야. 약속할 수 있지?”

“예, 약속할 게요.”
“선생님도 휴일 잘 보내세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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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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