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모나코에 사냥을 갔던 일본인은 안내인이 너무 고마워 엽총을 선물로 준다. 그러나 그 우연한 행동이 커다란 비극을 가져올 지는 아무도 몰랐다. 안내인은 주민에게 돈을 받고, 총을 판다. 그 총을 산 주민은 염소와 양을 치는 목동인데 하이에나를 물리치기 총을 구입한 것이다.

그 목동의 두 아들에게 총을 주고, 양과 염소를 지키게 한다. 두 아들은 총으로 얼마나 멀리 있는 표적을 맞출 수 있는지 내기 걸기에 이른다. 그 와중에 근처를 지나던 버스에 총을 겨누어 총알을 발사한다. 마침 아들을 잃고 머리를 식힐 겸 여행하던 미국 부부에게 총격이 가해진다. 결국 창가에 앉아 있던 리처드(브래드 피트)의 아내 수잔(케이트 블란챗)이 총에 맞고 만다.

곧 이 일은 미국에 대한 테러라 규정되며 국제적인 뉴스가 되는 것은 물론 외교적으로 심각해진다. 경찰은 범인을 쫓고, 이 과정에서 목동의 큰 아들은 경찰이 쏜 총에 맞는다. 한편 리처드의 두 아이들을 데리고 자신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멕시코로 향한 유모 아멜리아는 국경 수비대에 걸려서 리처드의 두 아들을 잃어버린다. 영화 <바벨>의 내용이다. 이는 결국 세계인들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내용의 질과는 상관없이 그 영화적 시각의 스케일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도 마찬가지 스케일을 지닌다. 아들에게 안정된 직장을 보여야 하는 벤 스틸러(래리 델리)는 급하게 박물관 야간 경비직에 취직한다. 그는 밤마다 박물관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대경 질색 한다. 파라오의 보물 때문에 박물관의 동물과 인간 미니어처, 밀랍 인형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은 끊임없이 반목하고 분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주인공 벤 스틸러는 세계의 역사를 모두 간직하고 있는 박물관에서 역사 속 문명과 인종의 갈등과 분쟁을 모두 화해시킨다. 고대인과 현대인, 동물과 인간, 야만인과 문명인, 인디언과 미국인, 서구 문명과 동양 문명, 백인종과 아시아 인종들이 갈등과 분란의 골을 넘어서 인류사적 화합을 이룬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서 압축적으로 보여주듯이 미국인 아빠 벤 스틸러가 주도한다.

그 주도하기에 용기를 주는 것은 미국의 26대 대통령 테드 루즈벨트(로빈 윌리암스)의 밀랍 인형이다. 화해의 축제에 쓰이는 음악은 다름 아닌 팝송이다. 더구나 잘못의 주체인 사람들에게 대한 책임은 없다. 예컨대, 인디언을 6백만을 학살한 책임은 지지 않으며, 자연을 파괴한 인간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다. 특히 카우보이 총잡이와 로마의 옥타비아뉴스와 동일한 영웅으로 삼는 것에서는 순간 아연해진다.

영화 <내셔널 트레져>가 미국의 역사와 문화가 모든 인류의 역사와 문화의 집합체라고 강조하는 것과 같다. 영화 <피닉스>에서는 19세기에 만든 미국인 자신들의 함선이 고고학적 유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영화 <터미널>에서는 미국의 재즈가 공산권 출신 인사도 흡입시키는 위력을 발휘한다.

자기 중심화의 속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의 주술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대중문화를 중심에 둔다. 끊임없이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며 주류의 역사로 삼는 것이다. 문화적 자긍심인지 오만인지 가늠하기 모호하다. 분명한 것은 문화적 각인으로 영화를 보는 세계인들을 세뇌시키는 점이다.

이준익 감독이 영화 <라디오 스타>를 만든 것은 한국 대중문화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밝힌 동기는 록 음악의 대부인 신중현의 마지막 투어 콘서트에 사회적 관심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대중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자는 것이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누구도 부여해주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왕의 남자>도 우리 문화의 현대적 전통화의 일환, 빈티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상당한 문화적 자긍심으로 꾸준히 부여해야 할 작업임에 틀림없다.

다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할리우드는 자국민의 문화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대중화가 기본 전략이고 이를 통해 문화 제국주의적인 행태를 보이지만, 어쨌든 끊임없이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융합시킨다. 그 가운데 자신들을 중심에 두는 것이다. 아직 한국 영화 아니 한국의 대중문화는 이러한 스케일과 시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의 것을 인정해 달라는‘응석의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자주 유럽 영화 시장에 들이대는 내용이 반복된 <천년학>같은 영화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수한 한국적 요소가 아니라 보편성을 지니는 문화적 코드의 다양한 접합이 우리문화의 경쟁력을 강화시킬 것이다. 더구나 외국 작품의 한국적으로 교묘하게 바꾸어 팔아먹는 일이 너무 잦다.

시오노 나나미가 말했듯이 로마가 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문화를 융화시키고, 다양성에 대해서 관용하는 다양성의 문화가 있었다. 세계사적 인류의 문명과 역사는 과연 한국의 일상과 관련이 없는 것일까? 한류의 지속성을 위한 고민과 조승희 씨 사건 그리고 국제 혼인의 급증을 생각할 때 더욱 이 점을 다시금 상기할 때다.

다행히 단초는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는지 모른다. <마리이야기>와 <여우비>에서 보이는 문화기호의 복합화는 새로운 가능성이다. 재패니메이션이 지닌 세계적 보편성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안에도 보낸 글입니다.


#천년학#바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아무 의미없는 자연에서 의미있는 일을 위하여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