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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왈츠> 촬영지에서 바라본 청산도. 위쪽에 조그맣게 보이는 방파제가 우리가 배를 타고 들어 온 도청항 방파제...
<봄의 왈츠> 촬영지에서 바라본 청산도. 위쪽에 조그맣게 보이는 방파제가 우리가 배를 타고 들어 온 도청항 방파제... ⓒ 이현숙
4월 28일 아침, 공기가 청량하다. 마음 같아서는 며칠 묵어가고 싶은데, 그럴 때마다 옆 사람에게 묻는 말.

"우린 언제쯤 한 곳에서 오래 머물며 여행할 수 있을까? 한 10년 후면 될까?"
"그때쯤이면 되겠지."

내 꿈은 차에다 일용할 물품들을 몽땅 싣고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여행하는 것인데, 아직은 요원한 꿈일 뿐….

권덕리 마을.. 마늘밭 바로 위 황토색 집에서 하룻밤...
권덕리 마을.. 마늘밭 바로 위 황토색 집에서 하룻밤... ⓒ 이현숙
권덕리 바로 옆 마을, 구장리와 바다... 난 이렇게 유명하지 않은 마을이 더 좋다
권덕리 바로 옆 마을, 구장리와 바다... 난 이렇게 유명하지 않은 마을이 더 좋다 ⓒ 이현숙
어제 방을 구할 때부터 민박집 주인의 말씨가 어째 낯익었다. 서울 말씨라면 혹시 서울사람? 밖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도 역시 같은 느낌이다. 나가다가 물어봐야지. 짐을 다 꾸리고 방문을 연다. 어제 아주머니가 오늘은 어딘가를 간다고 하더니, 아저씨 혼자 텃밭에 물을 주고 있다.

"혹시 서울에서 오셨어요?"
"그랬지요. 지금도 막내딸은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어요. 상계동에…. 오늘 집사람이 올라갔지요."

"서울에 있다가 여기 살면 답답하지 않으세요?"
"어휴 서울이 답답하지요. 여기가 뭐가 답답해요. 심심하면 낚시로 물고기 몇 마리 잡아다가 회 떠서 소주 한 잔 마시고 여기가 얼마나 좋은데요. 서울 가면 진짜 답답해요."

에고 부럽다. 좋은 건 알지만 거의가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 놀아 마음만 좋은 곳에서 떠돌고 몸은 복잡한 서울에 남아 있는 게 보통인데….

이분들은 여기에 내려온 지 10년째란다. 처음부터 민박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손님이 어찌나 많이 오는지 본채만으로는 힘들어, 옆에다 우리가 잔 황토집을 짓고 아예 민박을 하게 되었단다. 시골에 살고 싶어 소양강 쪽과 청산도(전남 완도군)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민물고기는 회로 먹을 수 없는데 바닷고기는 회로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청산도로 내려왔다고. 낚시를 어지간히 좋아하시는 분 같다.

내가 보기에도 이곳 풍경은 빼어나다. 방에서도 해송과 들판과 바다가 보인다. 짐을 꾸려 나오다가 들른 바닷가는 정말 최고. 떠나기 싫을 정도로 삼삼한 경치인데 포구 이름이 뭐냐니까 이름이 없단다. 그래서 우린 그냥 권덕리 바다라고 부르기로 했다.

권덕리에서 나와 길을 달리는데 바로 옆 동네가 절경이다. 그냥 갈 수 없잖아. 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려 바다를 바라본다. 이 마을 이름은 구장리. 이 마을은 꿈에서도 한 폭의 그림으로 나타나리라.

이름도 없는 이런 마을에 비하면 영화 촬영지나 해수욕장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관광지로 때가 탄 느낌이랄까, 암튼 너무 손질을 한 탓으로 본질이 떠나 버리고 껍질만 남은 것 같다. 그래서 <서편제> 촬영지나 <봄의 왈츠> 촬영지는 그저 눈으로 한 번 보는 걸로 만족하고 길을 떠난다. 그런데 <봄의 왈츠> 촬영지 옆으로 길이 나 있다. 눈에 보이는 건 숲이 우거진 산뿐인데.

호기심이 동한 기사, 머리를 갸웃거리며 그쪽으로 핸들을 돌린다. 이건 모험인데,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 험준한 히말라야나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그곳에 대한 정보는 조그맣게 쓰인 화랑포라는 팻말이 전부. 길이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차를 돌릴만한 장소는 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차는 간다.

화랑포 가는 비교적 넓은 길. 좁은 길에서는 차를 세울 수도 없었다.
화랑포 가는 비교적 넓은 길. 좁은 길에서는 차를 세울 수도 없었다. ⓒ 이현숙
화랑포에서 바라본 바다.
화랑포에서 바라본 바다. ⓒ 이현숙
길은 산허리에 난 구불구불한 외줄기. 그 시가 생각난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그런데 이 길이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인다. 자동차 한 대 겨우 다닐 정도의 좁은 길이고 밑은 까마득한 낭떠러지. 나는 안전벨트를 매고 손잡이를 꼭 잡는다. 5분쯤 가니 두 길이 갈라지는 데가 나오고 우리는 오른쪽 길을 선택해 간다.

굽이굽이 바다를 끼고 산기슭을 휘돌아 가는 길. 오른쪽은 망망대해요, 왼쪽은 산이다. 모르고 지나쳤으면 후회할 일도 없을 터, 그러나 우리는 또 탄성을 지르며 간다. 까딱 잘못했으면 이렇게 멋있는 길을 그냥 지나칠 뻔했네, 하면서. 이게 바로 우리 여행의 묘미. 그런데 화랑포가 어디지? 산을 돌아 차를 세우고 바다를 바라본다. 양식을 위해 바다에 쳐 놓은 시설물조차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그전엔 눈엣가시였는데. 저것들이 좋은 바다 풍경 다 버린다며.

그대로 길을 따라나오니 다시 두 길이 합쳐지는 곳에 다다랐고 무사히 <봄의 왈츠> 촬영지로 귀환이다. 마침 청산도 택시가 와 있어 기사님에게 물었다. 화랑포가 어디냐고.

"그 길이 다 화랑포요."

나는 내친김에 더 물었다. 청산도는 차를 갖고 들어오지 않으면 택시를 타야 둘러보는데 내가 들은 말로는 한 시간에 2만원이었다. 그런데 기사님은 3만원이란다. 그건 택시가 처음 생겼을 때 얘기라고. 지금은 올라서 3만원이고 두 시간에는 5만원이란다. 차이는, 두 시간짜리에는 화랑포와 범바위가 들어간단다.

청산도 택시 기사님(왼쪽)과 <봄의 왈츠> 촬영지
청산도 택시 기사님(왼쪽)과 <봄의 왈츠> 촬영지 ⓒ 이현숙

마늘밭. 청산도에는 보리밭보다 마늘밭이 많다.
마늘밭. 청산도에는 보리밭보다 마늘밭이 많다. ⓒ 이현숙

"청산도엔 택시가 몇 대나 있지요?"
"모두 네 댄디, 오늘은 한 대가 서울 가부러서 세 대뿐이요."

사진 한 장 찍자니까, '낸 인물이 없어 사양할라요' 하면서도 거절하지 않고 가만히 서 계신다. 청산도엔 버스도 한 대 다닌다는데 하루종일 다녔어도 보질 못했다.

범바위에 대해서는 민박집에서도 들었다. 우리가 잔 동네 바로 위에 있는데 차로 가려면 삥 돌아서 가야 한다고. 기사님에게 자세히 묻고 길을 떠난다. 길가에 마늘밭이 있고 아주머니 여럿이 서서 일을 하고 있다. 차를 세우고 카메라를 들고 나간다.

"아야, 맨입으로 사진 찍을라고?"
"그럼 어떻게 할까요?"
"아야, 까자라도 사와야지. 근디 이건 찍어 뭣헐라고?"

남도를 여행하면서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나는 마늘종을 따서 팔려고 그러나 했더니, 팔려면 품이 들어서 그냥 따 주는 거란다. 종을 따 줘야 마늘 알이 굵고 실하게 된다며, 나더러 좀 따 가란다. 난 신이 나서 한 줌 딴다.

"오메, 고것 갖고 뭣할라고?"
"저는 이거면 충분해요."

조금이지만 당장 오늘 저녁 고추장에 콱콱 찍어 밥반찬 해야지. 마늘종 몇 개로 부자 된 것 같다. 손에서 매콤한 마늘냄새가 난다. 그 냄새가 좋아 흠흠거리며 자꾸 냄새를 맡아 본다.

범바위 가는 길, 당연히 험하다. 예쁜 이정표를 지나 마을을 벗어나자 차 한 대 겨우 지날 정도의 길이 나온다. '여기서 나오는 차를 만나면 어쩌지' 난 진땀이 난다. 앞에 마침 사륜구동이 한 대 간다. 다행이다. 저 차를 따라가면 되겠지. 그런데 길이 조금 넓어진 곳에 이르자 앞차가 멈춘다. 그리고 기다려도 출발을 하지 않는다. '우리보고 먼저 가래나' 우리가 앞질러 가자, 그때야 우릴 따라온다. 위험한 길, 먼저 가고 싶지 않다는 뜻?

어미 범바위(왼쪽)와 새끼 범바위.
어미 범바위(왼쪽)와 새끼 범바위. ⓒ 이현숙
빨간 지붕이 있는 마을이 권덕리. 바다 너머 산허리로 하얀 길이 드러나 보이는 산이 화랑포.
빨간 지붕이 있는 마을이 권덕리. 바다 너머 산허리로 하얀 길이 드러나 보이는 산이 화랑포. ⓒ 이현숙
범바위에서 바라 본 바다. 바로 앞에 여서도가 보인다.
범바위에서 바라 본 바다. 바로 앞에 여서도가 보인다. ⓒ 이현숙
범바위는 둘이다. 어미 범바위, 새끼 범바위. 아까 본 택시가 범바위 앞까지 차를 몰고 들어온다. 택시를 타고 온 사람들은 범바위 위를 오른다. 기사는 행여 사람들이 위험한 길로 들어설까 봐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말한다. '날이 좋으면 범바위에서는 제주도와 거문도가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날씨가 흐려 보이지 않았고 여서도만 바로 눈앞에 있다.

손 닿을 듯 가깝게 보이는 섬, 여서도. 그러나 배로 가면 1시간 10분이나 걸린단다. 그리고 그 섬은 이틀에 한 번 배가 있단다. 그 섬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뿌연 바다 위에 떠 있는 저 미지의 섬에는. 어미 범바위에서 산등성이를 오르면 전망대가 있고 거기서 조금 더 오르면 조그만 바위, 새끼 범바위가 있다. 나는 어미 범바위 대신 예쁜 오르막길 새끼 범바위길을 걸어 오르고 내가 좋아하는 섬, 거문도를 바라본다. 뿌연 안개 속으로 어슴푸레한 형체만 들어나 보인다.

주차장으로 나와 차를 타고 출발한다. 아까 그 사륜구동이 우릴 따라오려는지 시동을 건다. 그분들 약간 연세가 드신 부부인데 범바위에서, '청산도가 좋다고 해서 왔더니 볼 것도 없어' 하셨다. 우린, 과연 볼 것이란 뭘까, 이런 풍경을 보고도 볼 것이 없다면 저분들의 볼 것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해하면서 그 아슬아슬한 길을 밟아 내려왔다.

#청산도#권덕리#범바위#화랑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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