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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광주항쟁 때나 별반 달라지지 않은 목포역
1980년 광주항쟁 때나 별반 달라지지 않은 목포역 ⓒ 김영석

1980년 5월 5일 어린이날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27년 전 그 봄날,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언제나처럼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고 학교를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는 내게 엄한 목소리로 "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봄방학이냐고 물으니 아버지는 아니라고 짧게 대답하셨다.

학교를 가지 않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무조건 집밖으로는 나가지 말라고 해서 좀 어리둥절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을 생각에 심심했던 기억이 난다. 아침을 먹고 집에 있자니 놀거리가 없어 너무 무료했다. 물론 집에는 나 혼자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당시 대학에 다니던 형이 방학도 아닌데 집에 내려와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형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 함께 놀아달라는 이야기도 하지 못한 채 나는 집안을 빙빙 돌았다.

방학도 아닌데 학교에 가지 않았다

점심 때가 될 무렵 창문을 여니 골목 밖으로 아이들이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부모님 말씀을 까맣게 잊고 그 아이들을 따라 목포극장 쪽으로 내달렸다. 집이 목포시내 한복판에 있어 목포극장은 1분, 목포역은 3분 거리였다. 아이들이 달리는 방향을 따라 달리다 보니 벌써 목포역에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한 풍경이 펼쳐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 '5월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던 목포역 광장에는 표정이 어둡고 낯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던 정거장에는 웬일인지 여러 대의 버스들이 멈춰져 있었고, 그 버스 지붕 위의 사람들은 철모나 투구를 쓰고, 손에 망치나 몽둥이·낫을 들고 있었다. 그 아저씨와 형들은 노래를 부르며 버스 지붕을 두드리고 있었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그 때서야 외출하지 말라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났다.

'아 빨리 집에 돌아가야 된다! 집에 돌아가자!'

돌아서서 목포역전 파출소를 향해 걸어가는데 버스 창문을 통해 누군가가 내게 빵을 주었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데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그 형은 내게 빵을 던져주었고 그 버스는 서서히 출발했다.

빵을 받아들고 보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보로빵이었다. 겉은 달콤하게 딱딱하고, 속은 부드러운 빵! '먹어도 될까?'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많은 내 또래 아이들이 빵과 음료수를 먹고 있었다. 또 다른 버스에서는 우리에게 음료수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소보로 빵에 사이다, 두려움이 사라졌다

5.18 광주항쟁이 한창이던 80년 5월 23일자 <조선일보> 7면. '폐허같은 광주... 데모 6일째'라는 제목으로 과격한 시위대에 의해 광주가 폐허가 된 것처럼 보도했다.
5.18 광주항쟁이 한창이던 80년 5월 23일자 <조선일보> 7면. '폐허같은 광주... 데모 6일째'라는 제목으로 과격한 시위대에 의해 광주가 폐허가 된 것처럼 보도했다. ⓒ <조선일보> PDF
나는 한손엔 빵, 또 한 손엔 사이다를 들었다. 순간의 두려움은 사라졌다. 빵과 사이다를 맛있게 먹고 있을 때, 아줌마와 아저씨들은 '고무다라이'와 라면상자에 주먹밥과 김치·빵·음료수 등 먹을 것들을 가져와 버스에 실어주었고, 버스에 탄 사람들은 웃으며 그것을 나누어 먹었다.

어린 내게는 충격이었다. 소보로빵과 사이다는 어머니께 사달라고 졸라야 먹을 수 있는 맛난 것이었다. 특히 소보로빵은 제과점에서 돈을 내지 않으면 절대 공짜로는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 이 사람들은 어떤 대가도 없는데 이 빵을 나눠주었던 것일까?

의문은 곧 멈추었고 난 빵을 맛있게 먹고, 집으로 돌아와 오후를 보냈다. 저녁에 퇴근하신 아버지와 어머니 대화 속에서 학교에 가지 못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은 "어떤 장군이 광주를 탱크로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과 대학생들을 잡아가고 있다, 그래서 현재 광주에는 갈 수도 없고 올 수도 없는 형편이며 전남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광주시민을 돕기 위해 버스와 차량을 타고 떠났다. 오늘도 버스 수십 대가 광주로 향했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조용히 주고 받으셨다. 순간 점심에 봤던 풍경이 생각났다.

부모님이 학교로 돌아간다는 형을 왜 크게 야단쳤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 후 어머니는 혹시 군인들이 형을 잡으러 올지 모르니 낯선 사람이 형을 찾거든 모른다고 말하라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렇게 오월의 그 낯선 하루는 지나가고 있었다.

버스 수십 대가 광주로 향했다

다음날도 학교에 가지 않았다. 목포역에 가고 싶은 마음에 어머니가 외출하시기만을 기다렸다. 어머니가 시장에 가시자 난 또 목포역을 향해 달렸다.

봄날 눈부신 햇살 속에서 난 낯설지만 흥미로운 풍경을 구경했다. 어제보다는 좀 더 여유 있게 교육청 앞 육교위에서 목포역전 버스정류장을 바라보니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삼삼오오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삼학도 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큰 버스를 손으로 밀며 목포역으로 오고 있었다.

육교에서 내려가 버스 뒤 사람들을 따라 걷다보니 목포전화국 앞 주유소에 도착했고, 어떤 아저씨와 버스를 밀던 아저씨가 시시비비를 가리며 말싸움 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기름을 넣으려면 돈을 내라! 돈을 내지 않으면 기름 한 방울도 주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사람은 "지금이 어느 시국인데 돈타령을 하느냐! 광주와 전라도에 군인들이 쫙 깔려 우리 국민을 적이라 부르며 잡아가고 있다. 이 버스는 광주시민을 도우러 광주에 가야하니 기름을 넣어달라!"고 요구했다.

그 후 몇 차례 실랑이가 오가고 한참 후 주유소 아저씨는 기름을 넣어주었고,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기름을 넣은 그 버스는 시동을 걸고 광주로 향했다.

다시 돌아온 목포역에는 한 아주머니가 버스에 탄 사람들에게 누군가의 행방을 묻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 아들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한 아저씨가 비슷한 학생이 어제 버스를 타고 광주에 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 아주머니는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나는 어제 내게 빵을 주던 그 형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그 형이 아닐까? 그리고 불현듯 집에서 나를 찾고 계실 엄한 어머니 얼굴이 생각나 집을 향해 뛰었다.

지금도 군인들이 날 잡으러 오는 꿈을 꾼다

1980년 봄 '화려한 방학'은 끝났지만, 난 아직도 악몽을 꾼다(사진 제공: 5·18기념재단)
1980년 봄 '화려한 방학'은 끝났지만, 난 아직도 악몽을 꾼다(사진 제공: 5·18기념재단)
다음날도 목포역의 모습은 마찬가지였다.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이야기 주고 받고 먹을 것을 함께 나누며 서로를 걱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사람들 속에는 가족들을 찾는 이도 있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버스들이 삼향 지산재를 넘어 광주로 향하다가 군인들의 무차별 총격에 사람들이 죽고, 상했으며, 청계지서가 불탔다고 했다. 그리고 광주에는 지금 큰 난리가 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왜 그리 낯설고 멀었는지 모르겠다. 그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꾸중을 들으면서 나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무서워 울기만 했다.

며칠 후 아침 부모님은 다시 학교에 가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등교길의 목포역 광장에는 그 많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목포역 옥상 위에 총을 든 군인들이 옥상 네 귀퉁이에 당당히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후 난 종종 옥상의 검은 군인들이 나를 잡으러 오는 꿈을 꾼다. 1980년 5월 어린이날 무렵의 '화려한 방학'이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머리에 남아 있다.
#목포역#광주항쟁#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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