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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잣나무숲으로 들어가다
울창한 잣나무숲으로 들어가다 ⓒ 김선호
목이 말랐다. 갑작스럽게 더워진 날씨를 예상하지 못하고 물을 적게 가지고 온 것이다. 수분을 보충할 거리라곤 오이 한 개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있을 거라던 약수터를 못 찾은 탓도 있다.

등산로를 정확히 숙지하지 못하고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이다. 길을 놓치고 산을 헤맨 기억이 이번이 세 번째다. 묘하게도 '무슨 무슨 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에서 길을 잃었다. 이번엔 청평의 '깃대봉'이다.

산을 오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이름하여 '등정주의'와 '머메리즘'. '등정주의'라 함은 정해진 노선을 따라 산행원칙에 준수하여 산을 오르는 지극히 상식적인 등산을 말하고, '머메리즘'이란 산행에 있어 어떤 원칙에 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하는 등산을 말한다고 한다.

이렇게 등산로 표시도 있었는데
이렇게 등산로 표시도 있었는데 ⓒ 김선호
잘 정비된 등산로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도 개척하고 상황에 따라 위험도 감수해 가면서 산을 오르는 머메리즘이 왠지 더욱 매력적인 등산 방법처럼 들린다. 그러나 언감생심, 등산에 있어 초보 수준을 막 벗어난 나에게 있어 '머메리즘'은 그저 이론으로 알고 있을 등산용어일 뿐이다.

깃대봉에서 길을 잃고 헤매이는 머릿속으로 '머메리즘'이라는 단어가 자꾸 떠올랐다. 그 순간 내게 절실했던 건 정해진 노선을 따라 편안히(?) 산행을 하는 '등정주의' 원칙이 더 간절했다. 다행히 산이 그리 높지 않았기에 산능선에 닿기까지 그리 고생스럽지 않았다. 산이 높지 않은 이유보다 더 다행한 일은 숲이 아직은 무성하지 않은 탓이다.

여기서 길이 갑자기 끊어져 버렸지요
여기서 길이 갑자기 끊어져 버렸지요 ⓒ 김선호
산길을 잃고 헤매이면서 그냥 그 즈음에서 멈추고 내려갈까 했던 생각을 멈추게 한 것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산능선이었다. 능선이 보인다는 것은 거기 산길이 있다는 신호 다름 아니다. 산 능선이 보이자 새롭게 힘이 났다. 아직도 수북히 낙엽이 쌓인 가파른 산길을 미끄러지고 발을 헛디디면서도 올라갈 생각을 했던 것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능선을 보았기에 가능했다.

군 벙커가 보였고 머잖아 능선상에 길게 뻗은 등산로에 섰을 때 사뭇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길을 잃고 헤맨 끝에 찾은 '길'은 새삼스럽게 고맙고도 반가웠다.

길을 잃는 것은 순간이었다. 어느 순간 길이 끊어져 있었고 왔던 길이 아까워 되돌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길이 있겠지 하고 무작정 위로 걸어서 다행히 등산로를 찾았으니 망정이지 산행에 앞서 등산로를 정확히 알고 가는 것, 그것은 언제나 산행의 기본이 아니겠는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지게 된 계기였다.

다시 찾은 숲길에서 본 각시붓꽃이 반가웠지요
다시 찾은 숲길에서 본 각시붓꽃이 반가웠지요 ⓒ 김선호
안전한 등산로에 들어서니 감회가 새롭고 산길 양쪽에 고루 피어난 보라색 각시붓꽃이 어느때보다 이쁘게 보인다. 봄꽃들이 지고 있었다. 가지마다 돋아난 잎새들로 싱그러운 숲은 이미 초여름을 방불케 했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산행중 땀이 솟았다. 그냥 베어나오는 게 아닌 등줄기로 흐르는 땀을 느끼며 여름을 예감하는 산행이었다.

길은 순탄하게 이어져 있었다. 능선따라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 걷기 좋은 오솔길 같다. 연둣빛 푸른 잎새를 달고 있는 신갈나무 숲이 싱그럽기 그지없는 길이다. 길을 잃고 산 중턱을 헤맸던 일에 비하면 이곳은 평화 그 자체다. 정상에 도착하기까지 딱 한 사람의 등산객과 마주쳤다. 등산로 표시가 잘 안 되어 있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무사히 깃대봉 정상에 도착하니 감회가 새로웠지요
무사히 깃대봉 정상에 도착하니 감회가 새로웠지요 ⓒ 김선호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은 산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깃대봉에서 바라본 청평댐과 팔당호 주변 경관은 아주 훌륭했다. 시야가 시원하게 트인 경치를 지녔으므로 여름 산행에 적합한 산이 깃대봉이다. 새로 생긴 산판길이 들어선 것 말고는 숲은 자연스럽고도 무성하다.

산 중턱을 기점으로 아래쪽으로는 침엽수가 울창하고 다양한 활엽수림이 그 뒤를 이은 전형적인 우리 숲의 형태를 갖춘 산이다. 해발고도 623미터의 깃대봉은 조종천에 산자락을 드리운 낮은 고도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까닭에 정상에 올라보면 800미터급 이상의 산을 오른 듯한 느낌을 준다. 정상 주변에서 바라본 능선의 장엄함 또한 여느 산 못지 않다.

'가루게마을'을 이정표로 삼아 하산을 하기로 한다. 하산길은 등산로 표시가 아주 잘 되어 있다. 별 어려울 것 없이 초록으로 물들어 가는 오월의 숲을 걷는 일은 그저 행복한 일이다. 정상에서부터 연둣빛 새순이 싱그럽던 길을 걸어 연초록 신갈나무 숲을 지나 진초록의 잣나무숲을 빠져 나오는 일은 이맘때 숲을 걷는 이에게 주어진 특별한 행운일 터이다.

청평댐이 발아래 찰랑이고
청평댐이 발아래 찰랑이고 ⓒ 김선호
하산을 마무리 하는 지점이었을 것이다. 깃대봉에서 맞이하는 오월의 햇살이 유난히 눈이 부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곳에서 자작나무 숲을 만났다. 자작나무에 유난히 마음이 끌리는 것은 내가 기마민족의 후손이라는 강력한 증거는 아닐까. 만나고 싶었던 자작나무를 멀리서만 보며 지나쳐 갔었다. 어쩌다 공원같은 데서 만나는 자작나무는 고유한 흰빛을 잃고 누렇게 떠 있는 듯 보였다.

내 앞에 자작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다. 바로 눈 앞에 펼쳐진 자작나무는 눈부신 하얀 수피를 하고 가장 연한 초록빛 잎새를 달고 있었다. 연초록 나뭇잎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어서 바라보는 나는 황홀한 기쁨을 맛보았다. 하산 내내 느낀 갈증도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자작나무 숲이 꽤 넓게 이어져 있었다. 나무 몸통에서 수피를 한 겹 벗겨냈다.

여름으로 가는 숲은 한없이 싱그러웠답니다.
여름으로 가는 숲은 한없이 싱그러웠답니다. ⓒ 김선호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이 얇은 수피가 천년의 세월도 견딘다는 얘길 들었다. 편지를 써서 둘까, 멋진 문구를 새길까. 천년의 세월을 견딜 만한 아름다운 문구를 찾을 수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자작나무 숲을 빠져나오는데 어찌 그리도 아쉽던지. 자작나무 숲을 빠져나오니 약수터가 보여 아쉬움을 달랜다. 갈증 끝에 만난 약수터의 물맛은 달고 시원하기 그지없다.

처음 길을 잘못들어 길을 잃고 헤매였으나 다시 찾은 길이 더 없이 아름다웠던 깃대봉의 산행은 자작나무가 있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자작나무 숲을 만난건 행운이었지요
자작나무 숲을 만난건 행운이었지요 ⓒ 김선호

자작나무 수피에 편지를 적을까요..
자작나무 수피에 편지를 적을까요.. ⓒ 김선호

깃대봉에서 만난 오월의 숲은 햇살이 눈부셨습니다.
깃대봉에서 만난 오월의 숲은 햇살이 눈부셨습니다. ⓒ 김선호

덧붙이는 글 | 북한강을 끼고 46번 국도를 가다 보면 가평 못미쳐 왼편에 펼쳐진 산이 깃대봉입니다. 등산로를 숙지하고 올라야할 산인데요, 가루게 마을 청구아파트 신축공사장을 지나 한참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등산로 입구가 보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이정표가 없어 고생했다고 하니 깃대봉을 가실때 유의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 일요일 (5월 6일)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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