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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빨래를 하기도 전에 새로운 빨래감이 생겼다.
미처 빨래를 하기도 전에 새로운 빨래감이 생겼다. ⓒ 전희식
전화기를 놓은 지 열흘쯤 지나서였다. 집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 놓고 처음 걸려온 어머니 전화가 반갑기는커녕 불길한 생각부터 들었다. 불이라도 났나? 마루에서 구르셨나? 유리잔이라도 깨져 다치신 건 아닐까.

당시 나는 마을회관에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일찍이 큰 도시로 나가서 제법 돈을 벌게 된 마을사람 한 분이 고향마을로 기금을 보내와서 고기도 굽고 술도 받아 놓고 잔치를 벌이던 중이었다.

고기나 술을 안 먹는 나는 대충 인사치레는 했으니까 눈치 봐서 자리를 빠져나올 생각이었는데 나이가 아래인 내가 술심부름 안주심부름 하느라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어머니가 전화를 한 것이다. 몇 번 "여보세요"하고 불러 봐도 아무 대꾸가 없어서 동네 어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부리나케 집에 왔더니 어머니는 되레 왜 이리 빨리 돌아왔냐고 했다.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가 실수로 재발신 단추를 누른 것이다. 가슴 졸이며 달려온 내가 멋쩍어졌다. 그러나 절묘한 순간에 고기연기 자욱하고 술이 넘치는 마을회관에서 나를 빼내주신 셈이다. 전화기 사용 실패작이라 부르기에 어머니의 실수는 훌륭했다.

어머니 새참 드리는 것도 잊고 어둑발이 질 때야 집에 돌아 온 적이 있다. 해발 620미터인 이곳에 처음으로 진달래가 핀 날이었다. 나 일하기 좋은 날이라고 해서 어머니 돌보는 일을 잊어버린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루에는 똥이 묻은 아래위 겉옷과 속옷이 쌓여 있었고 방 안에도 어머니가 움직이신 동선을 따라 똥칠이 되어 있었다.

똥을 눈 지가 오래 되는지 작은 똥 덩어리는 딱딱하게 말라붙어 있었고 손이나 발에도 똥 칠갑이었다. 어머니는 불도 켜지 않고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내가 왔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돌부처처럼 가만히 있었다.

첫 봄꽃에 취해 일을 하고 있는 자식을 차마 똥 치우러 오라고 전화로 부를 수가 없었을까. 똥을 이렇게 많이 누었으니 당황해서 전화 할 생각조차 못한 것일까. 위급할 때 쓰이지 못한 전화기는 방 다른 쪽 구석에서 어머니처럼 풀이 죽어 웅크리고 있었다.

방에 군불 때야지, 저녁 밥 지어야지, 빨래는 내일 하더라도 방에 있는 똥 닦아 내야지, 뭘 먼저 해야 할지 참 난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농어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전화기#재발신#똥 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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