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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의 수련. 언제 보아도 곱고 순수하다.
지난 여름의 수련. 언제 보아도 곱고 순수하다. ⓒ 최성수
국수리는 작은 마을이다. 양수리에서 양평쪽으로 남한강 물줄기를 따가 가던 길이 강을 버리고 왼쪽으로 휘어지는 곳에 국수리는 숨은 듯 자리 잡고 있다.

국수리를 지날 때면 나는 때때로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을 떠올리곤 한다.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전학을 오던 2월 어느 날,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오다 문득 마주친 역이 국수리였다.

그때까지 강원도 밖으로 나가 본 적이 별로 없었던 내게 그 길은 두렵고 무서운 것이었다. 복잡한 기차에서 낯선 얼굴들과의 부대낌에 한없이 위축되어 있던 내게, 문득 나타난 역은 조그마했다. 완행열차만 설 것 같은 작은 규모의 역에, 역사 역시 오두막집 같았다.

연칼국수의 쫄깃한 맛이 써는 모습만 봐도 생각난다.
연칼국수의 쫄깃한 맛이 써는 모습만 봐도 생각난다. ⓒ 최성수
팽팽한 긴장감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내게, 국수역은 작은 위안으로 다가왔다. 철로변으로 몇 채의 집만 옹기종이 모여 있는 곳, 그곳은 내가 떠나온 내 고향 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익숙함과 정겨움이 긴장한 내게는 위안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서울 살이를 하며, 나는 늘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지진아였다.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생활도 그랬고, 답답하게 이어져 있는 서울의 집들도 그랬다. 무엇보다도 없는 것 없이 살아가는 서울내기들의 풍족한 생활이 그랬다. 아마도 문화 실조 같은 것이었으리라.

어쩌다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면, 나는 국수리를 다시 만나곤 했다.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한동안 달리다, 덕소와 팔당을 지나면 나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국수역을 기다리곤 했다. 내가 탄 기차는 주로 국수역을 그냥 지나쳤지만, 나는 스치는 국수역을 마치 그리운 사람이라도 되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국수를 스쳐 지난 것이 벌써 사십 년에 가까워진다. 이제는 기차를 타지 않고 차를 몰고 국수를 지나간다. 그래서 국수역은 내가 지나가는 길에 볼 수 없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국수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어린 내가 서울이라는 낯 선 곳으로 떠나던 첫 날, 위안이 되어 주던 그대로 말이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연칼국수. 해물을 넣어 맛이 시원하면서도 구수하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연칼국수. 해물을 넣어 맛이 시원하면서도 구수하다. ⓒ 최성수
국수리에는 이름 때문인지, 국수집이 몇 군데 있다. 나는 처음 국수역을 국수(菊水)라고 생각했다. 팔당 댐을 막아놓아 호수가 되어버린 양수리의 남한강쪽 상류이니, 물 많고 국화꽃 우거진 곳이라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 지명은 국수(菊秀)였다. 어쨌든 국화꽃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이리라. 그런데 그 이름에서 유추하여 국수집을 만들었으니, 그 또한 제법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자주 들르는 국수리의 국수집 중 하나가 '두물머리 연칼국수'집이다. 주말마다 고향 보리소골에 갔다 일요일이면 올라오게 되는데, 점심 무렵이면 국수리를 지나게 된다. 그래서 먹을 만한 집을 찾다가 들른 곳이 바로 연칼국수집이다.

처음에는 연칼국수라는 독특한 이름 때문에 들렀는데, 알고 보니 꽤 이름 있는 집이라고 한다. 궁중 음식 연구가인 한복려 선생에게서 배우고, (사)우리문화가꾸기에서 연구 지원을 하여 연 요리를 만들어 냈다고 하니, 그 이름값만으로도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두물머리 연칼국수집. 그곳에 가면 연으로 만든 온갖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두물머리 연칼국수집. 그곳에 가면 연으로 만든 온갖 음식을 맛볼 수 있다. ⓒ 최성수
연칼국수와 연밥을 시키자 정갈한 밑반찬들이 나온다. 화려하지도 가짓수가 많지도 않지만, 담아낸 품위가 연꽃의 순수함을 닮아 있다. 해물을 가득 넣고 육수를 부어 끓이다가 익혀 먹는 연칼국수의 맛도 그만이다.

연잎 칼국수와 연근 칼국수, 연씨(연자) 칼국수 세 종류의 칼국수는 국수의 색깔도 다르고 맛도 조금씩 다르다. 연잎 국수는 파란색, 연근 국수는 갈색, 연씨 국수는 흰색인데, 적당히 숙성시킨 반죽을 사용해서인지 쫄깃쫄깃하면서 구수하다.

연잎에 곱게 싸 쪄내온 연밥
연잎에 곱게 싸 쪄내온 연밥 ⓒ 최성수

연잎을 벗기면 안에 약밥 같은 연밥이 김을 모락모락 내며 나타난다.
연잎을 벗기면 안에 약밥 같은 연밥이 김을 모락모락 내며 나타난다. ⓒ 최성수
인공 양념을 사용하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담백한 맛이 느껴지는 국수도 입맛을 당기지만, 연밥 또한 별미다. 연잎에 찹쌀과 대추, 잣 등 온갖 재료를 섞어 쪄내 독특한 연잎의 향을 느낄 수 있다. 연잎을 살짝 벗기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연밥을 떠먹는 재미가 그만이다.

겨울철이면 전식으로 연자죽을 내오고, 여름이면 후식으로 연근과 꿀을 섞어 얼린 샤베트를 내놓는다. 갖가지 음식마다 맛과 정성이 어우러져 먹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두물머리 연칼국수'집은 어쩌면 추억을 떠올리는 맛 때문에 자주 들리게 되는지도 모른다.

연근을 갈고 꿀을 넣어 만든 샤베트. 겨울철에는 자주빛 연자죽(연씨죽)을 대신 내온다.
연근을 갈고 꿀을 넣어 만든 샤베트. 겨울철에는 자주빛 연자죽(연씨죽)을 대신 내온다. ⓒ 최성수

이제 여름이 오면 싫토록 연꽃 구경을 하고, 연으로 만든 음식 맛을 보기 위해 국수리를 찾을 것이다.
이제 여름이 오면 싫토록 연꽃 구경을 하고, 연으로 만든 음식 맛을 보기 위해 국수리를 찾을 것이다. ⓒ 최성수
이제 머지않아 두물머리 세미원에는 연꽃이 환하게 피어날 것이다.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은근히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연꽃 구경을 싫도록 하고 난 뒤, 국수리 연칼국수로 연꽃 구경의 뒤풀이를 하는 재미에, 나는 또 두물머리와 국수리를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나는, 이제는 아득한 세월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내 기억 속의 국수역과 국화 대신 연꽃을 떠올릴 것이다. 추억은 풍경으로, 맛으로 다시 태어날 테니까.

덧붙이는 글 | *저의 다른 글과 사진은 제가 운영하는 카페 http://cafe.naver.com/borisogol.cafe에서 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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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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