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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제품은 원산지가'수입산'이라고만 되어있고, 맨 아래 제품은 '국산'과 '중국산'이 제대로 표시되어 있다.
위의 두 제품은 원산지가'수입산'이라고만 되어있고, 맨 아래 제품은 '국산'과 '중국산'이 제대로 표시되어 있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찻잔 옆에 놓인 과자에 손이 갔다. 포장이 예뻐서 눈에 확 띄는 과자였다. 커피와 함께 과자를 들다가 포장 겉면에 적힌 내용에 눈길이 갔다. '밀·대두·땅콩·계란·우유에 민감한 반응이 있으신 분은 드시기 전에 원재료명을 확인하세요.'

그래서 원재료명을 확인하는데,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어찌된 영문인지 원산지명이 기재되어야 할 부분에 '국명'은 없고, 뜬금없이 '수입산'이라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은 어떤지 사무실에 있는 다른 과자 봉지들도 확인해봤다.

A사: 원재료명 : 소맥분(밀, 수입산)
B사: 초콜릿 칩 : 코코아매스(수입산), 코코아버터(수입산)
C사: 대두(수입산)
D사: 현미 60%(국산 16.7%, 중국산 83.3%)


괜히 약 오르기 시작했다. '수입산'이라고만 해놓으면 그 소맥분(밀가루)이 방부제를 많이 쓰는 나라에서 왔는지, 대두(콩)가 농약을 많이 쓰는 나라에서 왔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건 완전히 기업들만 편리한 방식으로 해놓은 원산지 표시였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논란에서 정부의 농민 설득이 통하지 않는 건 어쩌면 그동안 정부가 보여준 기업 위주 정책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천'하면 쌀, ''청송'하면 사과... 원산지가 중요해

원재료명을 확인하라는 안내 문구.
원재료명을 확인하라는 안내 문구. ⓒ 고기복
1991년 정부는 수입개방화 추세에 따라 값싼 외국산 농산물이 무분별하게 수입되고 그 농산물들이 국산으로 둔갑돼 판매되는 등 부정유통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공정한 거래질서를 확립하고 생산농업인과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는 '농산물 원산지 표시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농산물 원산지표시제도는 위에서 본 것처럼 기업들의 편의를 위해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농산물품질관리법 제2조 6항에 따르면, '원산지'란 '농산물이 생산 또는 채취된 국가 또는 지역'을 말한다.

굳이 '신토불이'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이천'하면 쌀, '청송'하면 사과 혹은 고추를 떠올리는 것은 농산물의 특성상 동일 작물, 동일 품종이라도 재배지역·기후·토질·재배방법·시기 등에 따라 품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중국산 인삼이 크고 모양이 좋더라도 개성·강화·금산 인삼과 같을 수 없고, 아무리 값이 싸다 한들 광우병 의심이 가는 미국산과 한우가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공품도 원료의 산지·가공방법 등에 따라 품질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미국·유럽연합·일본 등 대부분 국가와 지역에서 원산지 표시제를 시행하고 있다.

한국도 산업자원부장관이 공고한 160개 수입 농산물 품목에 대해 원산지 표시를 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다(대외무역법 제23조 제1항). 예를 들면, 과자에 쓰인 밀가루가 중국산이면 '중국' 또는 '중국산', 영어로는 'Made in China' 또는 'Product of China''라고 기록해야 한다.

제도 취지 퇴색시키는 예외조항

그런데 이 부분에서 기업 형편에 따라 원산지 표시와 관련해 이상한 예외 조항을 두고 있다. 원산지 표시를 그냥 '수입산'으로 표시할 수 있도록 한 다음과 같은 경우다.

▲수입 원료를 사용하는 경우로 최근 1년 내지 3년 동안 연평균 3개국 이상 원산지가 변경된 경우 ▲최초 생산일로부터 1년 이내에 연평균 3개국 이상 원산지 변경이 예상되는 신제품인 경우

또 여기서 '원산지 변경'이라 함은 다음과 같다.

▲특정 원료의 원산지 국가가 변경되는 경우 또는 원산지 국가별 혼합 비율 증감 범위가 15% 이상인 경우 ▲정부가 가공품 원료로 공급하는 수입쌀을 사용하는 경우

그런데 농약 범벅, 방부제 범벅인 밀가루·콩·쌀 등의 농산물을 수입하는 기업에서 임의적으로 '수입산'이라고 해놓는다고 해도 소비자가 원산지가 어떻게 변경됐는지 감시할 방법이 없다.

결국 이같은 상황에서 원산지 표시제는 한마디로 웃기는 제도일 수밖에 없다.

'수입산'이면 다 같은 '수입산'인가

지난 6월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대형 할인마트 앞에서 '음식점 원산지 표시제 도입과 수입쌀 시판 반대 소비자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자료사진).
지난 6월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대형 할인마트 앞에서 '음식점 원산지 표시제 도입과 수입쌀 시판 반대 소비자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장재완
이같은 '원산지 변경' 규정대로라면, 기업들은 1년에 3회 이상 주거래처를 바꿀 경우 거래처가 어디인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된다. 이윤창출이 목적인 기업에서 주거래처를 1년에 3회 이상 바꾼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원산지 표시를 '수입산'이라고 해놓은 부분이 쉽게 납득되지 않고, 정부 정책을 믿고 수입농산물을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드는 건 당연지사다.

이에 대해 이지현 서울환경연합 시민참여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2005년 식품표시 기준 개정 운동을 하면서 원산지 표시 의무화를 주장했으나, 당국에서는 포장재 비용 상승 등 문제가 생긴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먹을거리의 안전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기업 편의주의적인 예외조항을 두지 말고 원산지 표시제를 지금보다 강화하는 것이 맞다."

묻는다. '수입산'이면 다 같은 '수입산'인가?

덧붙이는 글 | 주위의 과자·음료를 확인해 보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코코아가 코티드 브아르산인지 멕시코산인지, 밀가루가 미국산인지 중국산인지, 전혀 확인할 길이 없더군요.


#농산물#원산지#신토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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