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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박종국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하염없이 붉은 말>이 도서출판 '천년의시작'에서 나왔다. 첫 시집<집으로 가는 길>(세계사, 2003)을 발간한 후 4년만의 일이다.

첫 시집 <집으로 가는 길>이 '어머니'와 '고향'으로 표상되는 유년시절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섬세한 언어의 무늬로 그려낸 것이라면, 두 번째 시집<하염없이 붉은 말>은 세계를 읽어내는 시인의 "하염없이 붉은 말"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곧 색(色), 색깔의 언어들인데 시인은 이것으로 우리 삶의 다양한 현상이나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읽어내고 있다.

색깔 만드는 게 직업인 나는
먹고사는 일도 색깔에 기댑니다
나는 색깔 만들고
색깔은 내가 사는 길 내어줍니다
만들 때마다 제 마음 들려줍니다
검정색 만들 때는
모든 파장 받아들이는 大德
어머니 마음 들려주고
흰색은 모든 파장 반사하는
어린아이 눈동자 같은 마음 들려주고
노랑은 나만의 행복한 마음
보라색은 고통을 견디는 방법 들려줍니다
색깔 만들 때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언을 듣습니다
내가 듣는 자연의 말입니다
색깔 속에는 내 생이 들어 있어

사람보다 사람같이 말하는
색깔의 말을 듣습니다 - '색깔은 말이다' 전문.


시의 진술대로 박종국 시인은 색(色)을 만드는 안료회사인 '대원색소'를 26년째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색(色)을 제조하는 직업에서 오는 구체적인 체험과 이순(耳順)의 연륜에서 오는 삶의 예지가 생의 연륜 이 시에는 오롯이 담겨져 있다.

검정색을 보면서 "모든 파장 받아들이는 大德/어머니 마음"을 읽어내고 또 흰색에서 또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어린아이의 눈동자를 읽어내고, 보라색을 통해서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읽어낸다. 그러니까 이번 시집에서 그는 직업적 경험과 노자와 장자 같은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 삶의 철학을 농축하여 시의 밭을 일구고 있다.

그 시의 밭은 다양하고 화려한 색체의 빛깔을 띠고 있다. 시집 속에 담긴 거의 모든 시편들이 이른바 색(色)과 연관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박종국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하염없이 붉은 말>은 우리 시단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색채의 세계에 집중한 독특한 시집이다.

이 시집을 두고 이재무 시인은 "색깔은 그에게 언어이고 소리이자 음악이다. 시집 <하염없이 붉은 말> 속의 시편들은 시인 자신의 전기적 생애의 일단과 타자와의 관계, 연애에 대한 감정과 자연 사물에 대한 단상, 그리고 부박한 오늘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 등속이 예의 '색깔론'에 힘입어 생동감 있게 사생화되어 있어 각별히 주의를 끈다"고 평하고 있다.

박종국 시인이 색(色)으로 우리의 삶과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깊고 고운 언어로 펼쳐놓고 있는 시행(詩行)을 몇 군데 인용해 본다.

"어머니가 남겨놓은 옥색 가락지 빛 속에/얼마나 많은 색깔들 겹쳐 있는지 모르고 왔다"('가난한 보물')
"하나하나의 색깔이 모여/숲을 이룹니다/전체와 부분이 살아 굽이치는/아름다움, 색깔이 만듭니다/자신의 특성대로 살아가는/충실한 삶의 결과입니다/제 바탕의 완성을 위해/……/땀 냄새 물씬 나는 색깔/내가 읽는 경전입니다"('色經')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네/모든 파장 받아들이는 검정색같이/밀도를 높여가는 것이네/단단해지는 것이네/검정색 밀도가 최고로 높아지면/제 색깔 놓아버리고/스스로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되듯/어두워진다는 것은/어둠을 풀어헤칠 여명이 되는 것이네"('어두워진다는 것은')
"빛 속에서 좋아하는 색깔은 받아들이고/싫어하는 색깔은 반사하는 마음,/순간마다 드러내는 소통입니다"('物色')
"색깔은 그림자와 같아서/몸 없이는 비추지 않습니다/색깔은 그림자,/마음과 같은 그림자입니다"('색깔은 그림자입니다')
"흰색에서 검은색까지/파장을 창과 방패 삼아 살아왔다/막고 찌를 때마다 달라지는 색깔들의 표정/드러내는 마음 읽어가면서/제 색깔 분명한 사람들일수록/열심 일하고 신나게 논다는 걸, 알았다"('마음이 색깔과 같지 않다면')

시집 '해설'을 쓴 유성호의 글 마지막 단락을 인용하면서 박종국 시인의 독후감을 끝맺는다. 다음 시집에는 좀더 깊어진 '색(色)의 사유'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저잣거리의 삶을 옹골차게 노래해주기를 바란다.

"가장 까만색 끝에는/발광의 힘이 있다"('검정색 만들기')면서 생의 아이러니와 색깔의 모순적 존재 형식을 유추하고 있는 그 힘과 아름다움으로 완성한 '색깔의 연금술'이 우리 시단에 은은하게 번져가기를 소망해보는 것이다. - 유성호 '색깔의 연금술'

수의를 입히자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방안을 환하게 밝히는 광채,

평생 남의 얼룩이나 닦아주는 걸레같이
얼굴에 잡힌 주름,

그 굵은 주름살 펼쳐진
백옥 같은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큰어머님은
밝음과 어둠이 만나는
그 주름 속에 모든 걸 접어두고 사셨습니다

크고 작은 주름이 색채였습니다 - '색채론' 전문.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하염없이 붉은 말

박종국 지음, 천년의시작(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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