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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릉으로 가는 길
공양왕릉으로 가는 길 ⓒ 김대갑
여기인가. 오백년 고려 왕조가 한 점 티끌이 되어 사라져 버린 곳이. 고분 뒤로 조금만 더 올라가니 해안가 언덕의 정상이 나타나고 궁촌해수욕장과 궁촌 항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인간세는 이리도 유한하고 저 바다와 암석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무한하구나. 다만, 고분을 지키며 하느작거리는 잔디들만이 질기고 외로운 삶을 반복할 뿐이다.

그의 이름은 '요'였다. 신종의 7대손이자 정원부원군 균의 아들이었다. 재위기간은 불과 3년 남짓. 우화도 회군을 단행한 이성계 일파는 일시에 권력을 장악했고,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를 무참하게 살해한 후에 창왕을 폐위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허울뿐인 공양왕을 앉혔다. 그의 의지는 애초부터 없었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을 뿐이다.

이성계는 그를 통해 배불숭유정책을 제도화했고, 고려의 직제를 폐지하고 육조를 창설했다. 주자가례를 도입하여 본격적인 유교이데올로기를 전파하였으며 친명 정책을 유지하면서 개혁드라이브를 가속화했다. 어느 정도의 개혁 정책이 완성된 후 공양왕은 용도폐기의 대상이 되었고 그에게 남은 것은 유배와 죽음의 그림자였다.

폐위된 공양왕은 맨 처음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 원주에서 잠시 머문 왕은 간성의 수타사로 다시 유배되었으며 마지막에는 삼척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많은 삶을 마치게 된다. 왕자 석과 우가 그를 따라 삼척으로 왔으며 수많은 왕녀와 하인들도 그를 따랐다. 그리고 고려 왕조에 끝까지 충성을 바쳤던 양근 함씨의 시조인 함부열도 그와 최후를 함께 했다.

잘 정돈된 석축 사이로
잘 정돈된 석축 사이로 ⓒ 김대갑
기이하게도 공양왕은 능이 두 군데이다. 하나는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있으며 또 하나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리에 있다. 일설에 의하면 궁촌리의 능은 민간전승에 의한 능이며 원당리의 능은 조선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능이라고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문헌 기록에 의하면 공양왕은 삼척에서 두 왕자와 함께 교살된 것으로 나온다. 이 기록은 궁촌리에 전해져 오는 민간전승과도 일치한다. 그가 삼척에서 살해된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시신의 행방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공양왕이 삼척으로 옮겨진 후 울진과 삼척의 유력 인사들이 공양왕 복위 운동을 하게 되었다. 옛 고려 왕조에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 차근차근 삼척으로 모여들어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그들의 거사를 눈치 챈 이성계 일파는 대규모 관군을 동원하여 그들을 무참하게 진압하였다. 진압된 공양왕의 추종자들은 고돌산 골짜기에서 집단 처형을 당했다. 당시 골짜기로 흐르던 계곡물이 한 달간 핏빛으로 붉게 물들 정도였다고 한다.

곧 이어 공양왕과 두 왕자도 '사라치'에서 교살되었고 이후 사라치는 '살해재'로 불리웠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이성계 일파는 살해재에 자객을 매복시켜 시신을 거두려는 왕씨 일족과 추종자들을 야살스럽게 죽였다고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왕의 시신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궁촌리에 전해진 전설에 따르면 마을 사람들이 3부자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할 장소로 시신을 메고 가다가 지금의 왕릉 자리에 그만 발이 붙었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언덕바지에 3부자를 매장하게 되었고, 이것이 지금의 왕릉이라는 것이다. 현재 이 왕릉은 강원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해마다 3월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허망하구나, 권력이란 것은.
허망하구나, 권력이란 것은. ⓒ 김대갑
그러면 경기도 고양의 원당리에 있는 왕릉은 어떻게 조성된 것일까? 궁촌리의 왕릉이 문헌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는 반면에 고양의 왕릉은 역사적인 기록에 분명히 나와 있다. 공양왕은 태종대에 이르러 비로소 왕으로 복위되어 공식적인 제사를 받게 된다. 이때 원당리에 왕릉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중종 13년의 기록에서도 공양왕릉이 고양군에 있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래서 지금 이 공양왕릉은 사적 제191호로 지정되어 있다.

재미있게도 한 사람이 죽어 두 군데에서 제사를 받고 있는 것이다. 두 군데에서 제삿밥을 먹어야 하니 공양왕의 입장에서 슬프다고 해야 할지 즐겁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모두가 권력 교체기에 일어난 슬픈 현상이 아니겠는가.

더 희한한 것은 제3의 공양왕릉이 있다는 것이다. 공양왕을 따라 왔던 고려의 충신 함부열이 왕의 시신을 거두어 고성산 서쪽 기슭에 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현재 함부열의 묘가 있는데, 그 위쪽에 비석도 상석도 없는 작은 묘가 바로 공양왕의 묘라고 한다.

함부열 집안에 전해져 오는 바에 의하면 양근 함씨의 시조인 함부열이 자손들에게 해가 끼칠까봐 왕의 무덤을 일부러 작게 만들었고, 해마다 축문 없는 제사를 지내라고 유언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양근 함씨 집안에서는 축문없는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이 정착한 마을이 고성군 왕곡마을인데, 왕곡마을은 전통 가옥이 잘 보존된 지역으로 유명하다.

임금이 유배를 왔다고 해서 궁촌리가 되었다고 했던가. 마을 사람들은 3년마다 해신제를 지내기 전에 반드시 왕릉에 먼저 제사를 지낸다. 원당리의 능에 비해 초라하고 소박한 궁촌리의 왕릉에는 상석도 비석도 없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곳이 진정한 공양왕의 능이라고 믿고 있으며, 음력 8월 초하루에 벌초를 하면 어부들이 큰 횡재를 한다는 믿음도 갖고 있다.

외롭고 쓸쓸하게 길가에 자리 잡은 공양왕릉. 권력의 허망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능 앞에서 잠시 고개를 들어 청담한 하늘을 보았다. 그 옛날의 하늘도 저렇게 푸른 물감으로 짙었으리라.

이성계가 창업했던 조선도 고려처럼 허망하게 사라져 갔으며 그의 후손들도 일제에 의해 외롭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고 말았다. 역사의 뒤안길이란 이런 것이다. 허무하고 또 허무한 것이 권력인 것을 그들은 저 하늘에서 깨달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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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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