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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정치풍자신문 <샤를리 엡도>
프랑스의 정치풍자신문 <샤를리 엡도>
"콜롱베에서 생긴 비극적인 무도회 : 한 명의 사망자 발생"

1970년 11월 16일 드골이 세상을 떴을 때 정치풍자 주간지인 <아라키리 엡도>는 이렇게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알렸다.

'콜롱베'는 드골이 살았던 마을 이름이고 '비극적인 무도회'라는 말도 불경스러운데, 거기에 한 술 더 떠 '한 명의 사망자 발생'이라는 표현을 썼다. 드골의 사망을 시골 촌부의 사망과 같은 수준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 문장은 충격적이다.

프랑스인들이기에 가능한 문장이었다. 결국 이 문장으로 인해 이 신문은 다른 건을 빌미로 발행이 금지되었지만, 프랑스 신문사에 길이 남는 사건으로 기록되어지고 있다.

<아라키리 엡도>가 문을 닫은지 1주일 만에 이 신문의 멤버였던 만화가 카부, 레저 등이 새로운 신문인 <샤를리 엡도>를 창간한다. 결국 구성인원은 거의 변하지 않은 채 명칭만 달리한 새 신문을 창간함으로써 정부의 제재에 반격을 한 셈이다.

프랑스는 68년 과격한 학생혁명을 치르고 내부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강압적인 프랑스 사회에 도전하기 위해 생긴 신문이 <샤를리 엡도>로 만화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제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정치풍자신문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스스로 좌파신문으로 자처하는 <샤를리 엡도>는 극우파인 '국민전선'과는 적대적인 관계로 1995년 6월 극우파를 금지시켜야 한다는 청원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현재 발행부수는 12만부. 100% 신문판매 수입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광고를 전혀 싣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독립성을 누리고 있다.

"민주 언론이 종교비판을 금지해야 하나?"

작년 2월 초 <샤를리 엡도>는 또 하나의 스캔들을 일으켰다. 2005년 9월에 덴마크 일간신문인 <율란스 포스텐>에 실린 무함마드의 풍자화 12개와 자사의 풍자화를 곁들여 실어 문제를 일으켰다. 이중 가장 문제가 되는 풍자화는 터번을 두른 무함마드의 모습이었는데 이 터번이 폭탄처럼 그려졌고 도화선이 막 타들어가고 있는 형상이었다.

원래 무함마드의 모습을 형상화하는게 금지되어 있는 아랍계 사람들이 단번에 들고 일어났다. 아랍인종과 종교를 모독하는 행위라며 아랍단체들이 이 신문의 압수를 요청한 것이다.

<샤를리 엡도>는 '표현의 자유'를 들어 정당함을 선언했고 결국 이 사건은 법정에까지 가게 되었는데 올 2월 9일자 <리베라시옹>은 이 사건을 맡은 안 드 퐁텟뜨 여검사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샤를리 엡도는 반종교를 부르짖는 자유-반정부주의의 전통을 갖고있는 특별한 신문임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 종교인 카톨릭부터 이 신문의 첫 번째 비판대상이 되어왔다. 풍자화는 사실을 알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언론이 종교비판을 금지해야 한단 말인가?"

이 검사는 "이 사건은 소송에 필요한 요인들이 충분치 않기에" 기각을 요청했고 결국 3월 22일 파리법원에 의해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언론뿐만 아니라 세계의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든 <샤를리 엡도>는 많은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집권당 대중운동연합(UMP)의 대선 후보인 사르코지와 프랑스민주연합(UDF) 당수 바이루, 사회당수 올랑드가 전적으로 <샤를리 엡도>를 지원하고 나섰다.

정치인들의 추문 폭로에 일가견이 있는 <르 카나르 앙세네>.
정치인들의 추문 폭로에 일가견이 있는 <르 카나르 앙세네>.
'허보'를 계속 날리겠다?

프랑스에는 이 같은 정치풍자신문이 여럿 있는데, 1915년에 창간된 <르 카나르 앙세네>는 <샤를리 엡도>에 필적하는 명성을 자랑한다.

당시는 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중이었고 프랑스는 전쟁에서 한창 고전중이었다. 정부는 모든 언론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소위 '군사기밀 보호'라는 기치하에 참혹한 전쟁의 실상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에 반기를 들고 태어난 것이 <르 카나르 앙세네>이다. 기자 출신의 모리스 마레샬에 의해 창간된 이 신문은 우선 그 이름부터 독특하다. 카나르의 첫 번째 뜻은 '오리(동물)'라는 뜻인데 신문, 허보, 거짓말이란 뜻도 지닌다.

'앙세네'는 '잇달아' '연이어'라는 뜻의 형용사로 결국 '잇달은 허보'를 보도하겠다는 뜻이며 또한 창간자 자신이 검열에 의해 '앙세네(사슬을 채우다)' 될 수 있다는 두 번째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허보는 '거짓이 진실처럼 보도되는 정보'를 뒤집은 것인데 결국 이 경우 허보가 진실이 되는 것이다.

<르 카나르 앙세네>는 좌익에 가까운 정치성향을 갖고 있지만 모든 정치정당과 경제적 이익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전히 독립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다. 이 신문은 초기부터 광고를 전혀 싣지 않은데 그 이유는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이다. <샤를리 엡도>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신문 판매 수입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지지율 1위인 사르코지가 자만심에 빠지지 않기 위해 면도때 하는 혼잣말 : "난 아직 대통령이 아니다." "난 아직 대통령이 아니다."
지지율 1위인 사르코지가 자만심에 빠지지 않기 위해 면도때 하는 혼잣말 : "난 아직 대통령이 아니다." "난 아직 대통령이 아니다." ⓒ <르 카나르 앙세네> 2월 21일자
드골은 대통령 재임시 자신이 마치 루이 14세처럼 군림했다. "텔레비전이 바로 나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루이 14세가 "국가가 바로 나다"라고 한 것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르 카나르 앙세네>는 이를 풍자하기 위해 신문에 '조정'이란 칼럼을 신설하여 왕과 신하들의 행동을 자세히 풍자하기도 했다. 1960년에서 69년까지 거의 10년 동안 지속된 이 칼럼에서 기자들은 루이 14세 식의 궁정어투로 신랄하게 드골을 비판했다.

드골이 정치에서 물러나고 퐁피두가 엘리제에 입성하자 '조정' 칼럼이 '섭정제'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퐁피두를 왕보다 낮은 격으로 하강시키는 것과 같았다. 1974년까지 지속된 '섭정제' 칼럼은 지스카르 데스탱이 대통령이 되면서 아예 사라졌는데 이유는 지스카르 데스탱이 만족할 만한 풍자를 제공하기엔 개성과 인품 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이용하지 않으면 마멸된다"

1960년대부터 <르 카나르 앙세네>는 일반 언론이 다루지 않는 정보와 정부가 연루된 스캔들을 터뜨리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언론의 자유는 그것을 이용하지 않으면 마멸되기 마련이다'를 슬로건으로 삼는다.

지난 40년동안 <르 카나르 앙세네>가 폭로한 굵직한 사실만 해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세 가지 사례만 짚고 넘어가자.

첫 번째 : 1971년과 72년에 이 신문은 당시 총리였던 샤방-델마의 세금통지서와 세무신고서를 보도했다. 샤방-델마가 총리라는 점을 이용해 4년 동안 1원 한 푼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샤방-델마는 74년 대선에서 참패한다.

두 번째 : 1973년 12월 3일, 이 신문 기자 한 명과 임원이 밤 늦게 우연히 사무실을 들렀다가 두 명의 연관공이 몰래 소형 마이크를 벽에 설치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DST(관구감시국)에서 누가 귀중한 정보를 제보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도청장치를 몰래 설치하려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소송으로까지 이어졌으나 결과는 정부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프랑스는 외국 언론의 심한 비판을 받아야 했고 프랑스정계에서도 심한 파장을 일으켰다.

세 번째 : 1979년 10월 10일 이 신문은 1973년 지스카르 데스탱이 재무장관일때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인 보카사로부터 다이아몬드를 선물로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은 1981년 대선이 있기 2년 전에 발생한 일로 지스카르 데스탱은 이 사건으로 국민들의 신임을 잃게 되고 대선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에게 참패한다.

결국 <르 카나르 앙세네>의 폭로로 인해 많은 정치인들이 중도에서 좌절하든가 아니면 반대로 제3의 인물들이 정부 주요자리에 오르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사르코지와 루아얄 부동산에서 냄새가 난다

사르코지의 아내 왈, "(대선이 끝나고) 5월에는 어디서 묵어야 할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뇌이유 아파트를 팔아버리면 어떡해."
사르코지의 아내 왈, "(대선이 끝나고) 5월에는 어디서 묵어야 할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뇌이유 아파트를 팔아버리면 어떡해." ⓒ <르 카나르 앙세네> 3월 14일자
올 대선에서도 <르 카나르 앙세네>는 이미 두 대형 후보의 배후를 파고 들어갔다.

지난 2월 28일 '사르코의 유리한 부동산 사건'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사르코지는 1997년에 파리 서쪽 부유층이 몰려사는 근교인 뇌이유의 시장으로 있을 때 뇌이유에 있는 아파트를 시중가격보다 30만유로나 낮은 가격으로 구입했다는 것이다.

15일후인 3월 14일 다시 새로운 사실을 보도했다. 사르코지가 뇌이유의 자뜨 섬(사르코지가 97년에 산 아파트가 위치한 곳이다)에 있는 시 소유 땅을 부동산업자에게 77만5천유로나 싸게 주고 팔았다는 것이다.

결국 부동산업자에게 시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시소유 토지를 매각함으로써 대신 자기 개인소유 아파트를 유리하게 구입했다는 것이다. 사르코지는 2006년에 자뜨섬에 있는 자기 아파트를 매각했는데 이 신문에 의하면 이 매각으로 사르코지가 번 이익이 122%가 된다고 한다.

사르코지는 이 보도에 대해 "이것은 대선 활동을 저해하고자 하는 모함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혔으며 자기가 부동산업자에게 토지를 싼 가격으로 판 것은 당시에 부동산 가격이 내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회당 후보 루아얄은 이 사건을 공격하고 들어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건에 대해 코멘트하지 않겠다"라고 밝혀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 이유가 1주일 후에 드러났다.

사르코지의 부동산사건을 발표한 지 1주일 후인 3월 7일 <르 카나르 앙세네>는 루아얄과 올랑드 커플을 공격했다. 신문에 따르면 이 커플의 재산이 실제보다 엄청나게 낮은 가격으로 신고되었다는 것이다.

이 커플은 프랑스 남부지방 꼬뜨 다쥐르의 부유층만 몰려사는 마을인 무쟁에 시골집을 하나 갖고 있는데 이 집의 가격을 27만 유로로 신고했다. 그러나 신문에 의하면 이 집의 실제가격은 루아얄-올랑드 커플이 신고한 가격의 3배는 될 것이라고 하며 결국 이로 인해 이 커플은 실제로 내야 할 재산세보다 훨씬 적은 재산세를 냈다고 밝혔다.

신문에 의해 밝혀진 이 사건들은 두 대선후보에게 치명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특히 사르코지의 경우) 그 여파가 생각만큼 크게 미치지는 못하였다. 어쩌면 두 후보들이 상대방을 공격해서 좋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결론에서 나온 결과인지도 모른다. 각자가 뒤에 뭔가 켕기는 점이 있으므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선이 아직 한 달 남아있는 상태에서 이 사건이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다시 불거질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정치풍자#아라키리 엡도#샤를리 엡도#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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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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