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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불편한 진실>
ⓒ 포스터
"집에서 헤어드라이어 자주 사용하시죠? 그거 줄이세요. 그리고 옷 어디서 사세요? 밸리몰? 옷 살 때 재활용가게(Thrift store)를 많이 이용하세요. 무조건 새것만 사려고 하지 말고요.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바로 그런 것들이에요."

아이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최근에 한 편의 영화를 봤다. 제목은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 감독은 데이비스 구겐하임, 주연배우는 우리가 잘 아는 전 미국 부통령인 엘 고어.

지구 온난화를 다룬 환경 영화인 이 작품은 얼마 전에 끝난 79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학교 강당에서 상영된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학생들뿐 아니라 학부모와 일반에게도 공개되었다. 그런데 관람이 끝난 뒤 패널로 참석한 대학교수들이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한 여학생이 이렇게 물었다.

"킬리만자로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히말라야 빙벽이 사라지는 등 지구 온난화가 불러온 재앙이 심각한데 그러면 생활 속에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그때 참석자 가운데 한 사람인 여교수가 바로 '과도한 에너지 사용 자제'와 '재활용 가게 적극 이용'을 제안한 것이었다.

"거 봐라. 엄마가 평소에 하던 말 그대로잖아."

이 영화는 사실 큰딸의 생물 수업 때문에 저녁을 먹은 뒤 '억지로' 가서 본 영화였다. 학교에서 점수를 짜게 주기로 소문난 베어 선생님. 그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교묘한(?) 제안을 했다.

"영화 <불편한 진실>을 관람하면 '보너스 점수(extra credit)'를 주겠다."

영화도 영화 나름이지 이 영화는 지구를 보존하고 환경의식을 고취하고자 하는 고리타분한(?) 영화인지라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보너스를 걸었던 것이다. 사실 베어 선생님의 사전에는 '보너스 점수'란 게 없다고 한다. 그런 만큼 이번 영화 관람에 대한 보너스 점수 제안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베어 선생님의 학점 짜게 주기는 어느 정도일까. 아이들은 학기 중에 수시로 퀴즈를 본다. 테스트와 달리 평소에 배운 내용을 그때그때 평가하는 퀴즈는 학생들에게 점수를 주기 위한 보너스 문제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베어 선생님의 퀴즈는 이런 보너스 문제를 기대할 수 없다.

더욱 가혹한 것은 부분 점수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과제물을 평가할 때 문법에 어긋나는 문장이거나 철자 하나만 틀려도 감점이고, 부호 하나 빠지고 복수(-s)를 쓰지 않아도 에누리없이 바로 깎아 버린다.

깐깐한 생물 선생님

▲ 'all the'를 안 썼다고 1점 감점. (선생님이 야박하다고 딸아이는 서운해 했다.)
ⓒ 한나영
▲ 저장해 간 파일을 학교 애플 컴퓨터에서 출력했는데 그만 줄이 밀렸다나? 1점 감점.
ⓒ 한나영
그래서 학생들로부터 원성이 높다고 한다. 학생들은 영어 시간도 아닌 생물 시간에 뭐 그런 시시한 것으로 점수를 깎느냐, 너무 까다로운 거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한다지만 베어 선생님의 태도는 절대 불변.

그런 까닭에 베어 선생님의 생물 수업에서 A를 받는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라나? 절대 평가를 하는 만큼 대충 점수를 잘 줘서 학생들의 학점 관리도 도와주면 좋으련만 베어 선생님은 호락호락 점수를 주는 법이 없다.

▲ 이 선생님이 바로 악명(?) 높은 맥 베어(Mac Bair) 선생님. 학교 앨범에서.
ⓒ 한나영
하지만 젊은 베어 선생님의 수업은 아주 재미있고 잘 준비되어 있어서 비록 학점이 짜고 원성이 높지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대단히 인기 있는 과목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명품 수업'을 하는 선생님이다.

아이들로서는 베어 선생님이 원망스럽겠지만 학생들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퀴즈나 과제물을 그렇게 꼼꼼히 체크해 주고 '대충주의' 대신 철저한 과학도의 정신을 보여주는 베어 선생님이 학부모인 나로서는 미덥기만 하다.

더구나 테스트 보는 날은 이른 새벽부터 나와서 일찍 온 학생들에게 리뷰도 해주고 질문도 받는다고 한다. 보고서를 낼 때는 학생들의 개인적인 질문에 자세히 설명도 해준다(하지만 미국의 모든 선생님들이 다 베어 선생님 같을 거라는 생각은 오해! 그렇지 않은 선생님도 많다).

큰딸은 보고서를 내는 날이면 아예 노트북 컴퓨터를 싸들고 가서 선생님의 설명을 우리말로 적는다고 한다. 아직은 영어보다는 한국어가 익숙하고 종이 위에 쓰는 것보다는 자판을 두드리는 게 빠르다고 하니까.

그런데 베어 선생님에 대한 이런 미더움을 더해준 사건(?)이 있었다. 바로 지난 수요일에 있었던 '컨퍼런스 데이(Conference Day)'에서 있었던 일이다.

컨퍼런스 데이는 아이들의 첫 분기 성적표가 나오면 그 성적에 대해 학과 선생님과 상담을 하는 날이다. 이 날은 학생들도 학교에 나오지 않고 선생님들만 출근하여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성적에 대해 학부모와 대화를 하는 날이다.

다행히 두 아이들은 모두 A를 받아 성적에 관해선 특별히 할 말은 없었다. 그래서 다음 학기에 수강할 과목에 대해 작은딸의 지구과학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베어 선생님의 생물 과목을 적극 추천했다(미국의 고등학교는 우리나라 대학처럼 개인이 수강할 과목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그 과목은 악명(?)이 높다면서요. 철자 하나만 틀려도 깎아 버리고 점수도 대단히 짜게 준다던데요."
"아, 그래요?"


전혀 몰랐다는 듯 선생님은 정색을 했다. 하지만 지구과학 선생님은 생물을 가르치는 베어 선생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또 그 과목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지구과학 선생님은 56살, 생물 선생님은 30대 초반이다).

점수가 아니라 삶의 태도를 배워봐

▲ 지구과학 메이슨 선생님. "베어 선생님의 생물 수업 강력 추천!"
ⓒ 한나영
"그건 부모님의 철학이 중요한데요. 만약 아이가 all A만 받기를 원한다면 이 과목은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아마 찬미도 잘해야 B를 받을 거예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실하지만 말예요. 하지만 베어 선생님 수업은 단순한 생물 수업이 아니고 인생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삶에 대한 태도도 배울 수 있는 수업이에요. 아이와 함께 잘 의논해 보세요."

성적도 중요하지만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강조하면서 동료 교사의 수업을 칭찬하고 추천한 지구과학 선생님의 교육철학도 훌륭해서 나는 즉석에서 사진을 요청하기도 했다.

학교에 다니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저 지식만을 습득하고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것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렇게 좋은 선생님을 만나 그 선생님으로부터 인생을 배우고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배우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목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A학점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공한 학생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베어 선생님은 참 행복한 분인 것 같다.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고 (점수 때문에 악명은 높지만 점수는 순간이고 선생님의 영향력은 영원하니까), 동료 교사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불편한 진실#온난화#미국#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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